"○○씨한테 물어봐! 모르는 건 전부 ○○씨한테 물어보면 돼!"
드라마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을 설명할 때 조연의 입을 빌려 발화되는 매우 흔한 대사다. 심지어 이런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회사는 꼭 대기업이다. 어릴 때는 이 말이 칭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 많은 직원들이 모두 한 사람에게만 질문을 쏟아붓는다면. 그 사람에게 회사생활은 천국일까 지옥일까?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적어도 나에게는 이 대사가 듣기만 해도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말이 되었다.
■ 회사에 오래 다니는 법 ① : 눈에 띄지 마라
회사에 오래 다니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직장인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된다. 일을 잘하면서 성격도 좋은 사람, 일은 잘하지만 성격은 나쁜 사람, 일은 못하지만 성격은 좋은 사람, 일도 못하고 성격도 나쁜 사람. 기업은 사내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하기 때문에 사내 인간관계 또한 능력 못지 않게 무시할 수 없다.
네 가지 부류 중 가장 먼저 회사를 나가게 되는 사람은 당연히 일도 못하고 성격도 나쁜 사람이다. 일을 못한다는 건 큰 틀에서 방법은 알지만 실수가 잦은 경우일 수도 있고, 흔히 말해 '일머리가 없는 경우'일 수도 있다. 심각한 건 후자다. 사내 업무의 프로세스와 각 부서의 업무영역을 이해하지 못하면 의도치 않게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기 쉽고, 타부서에서 부서장에게 끊임없이 항의를 넣으며 압박을 행사할 수 있다. 천성이 나쁘지 않은 사람도 이렇게 되면 사내 인간관계가 틀어지게 되고 해고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일은 잘하지만 성격은 나쁜 유형 또한 다시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정말 말 그대로 '성격이 나쁜 경우'다. 이런 케이스가 사내에서 살아남을지 여부는 기업의 분위기에 따라 많이 좌우된다. 동료들끼리 서로 대놓고 폭언을 퍼부어도 아무렇지 않은 회사가 실제로 존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회사에서는 유순한 사람이 살아남지 못한다.
다른 케이스로 '회사에만 말 안 듣는 사원으로 찍힌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정당한 권리와 업무분장을 주장하고, 자신의 기준을 확고하게 지키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는 그저 일 잘하는 직원이지만, 회사 입장에선 더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안 하는 사람이 된다. 자신의 선을 분명하게 알고 지키기에 이들이 번아웃 증후군을 겪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따라서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다. 이들이 회사를 떠날 때는 더 좋은 곳을 발견했을 때다.
회사에서 오래 살아남을 또 다른 사람은 일은 못하지만 성격은 좋은 사람이다. 이 유형의 사람은 직장인들이 대하기 가장 어려워 하는 부류의 인물이다. 대개 경력 대비 실수가 잦고 업무역량이 부족하지만 항상 동료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고 해맑은 모습을 보인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너무 착해서 더 답답해."라는 푸념을 할 뿐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싫은 소리를 하지는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회사를 다니는 게 오히려 편하다. 역량 부족으로 업무 배정에서 배제되고 엉뚱한 사람이 그 사람의 업무를 맡게 되기 때문이다.
그 업무는 일을 잘하면서 성격도 그리 모나지 않은 사람이 맡게 된다. 일을 시키면 그저 묵묵히 해내는 사람. 부서장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온갖 명분을 갖다붙여서 일을 떠민다. 부당함에 대해 항의를 해봤자 소용없다. 이미 상부에서는 그 일의 담당자로 그 사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사람들은 항의 강도도 세지 않다. 그렇게 불만과 피해의식이 누적되다보면 회사를 다니는데 회의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결론은 자연스럽게 이직이나 퇴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회사에서 눈에 띄지 않을 것. 그것이 회사에서 오래 살아남는 첫 번째 방법이다.
■ 회사에 오래 다니는 법 ② : 친절하지 마라
직장인에게 인간관계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해놓고 친절하지 말라니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정확히는 업무의 영역에서 친절의 정도를 조절하라는 의미다. 회사 업무는 여러 부서와 연결되어 있다. 업무이해도를 확장하고 업무효율을 높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담당업무가 아니더라도 관련 업무에 대한 기본지식을 쌓고 역량을 키워나간다. 여기까지는 본인이 원했으니 나쁘지 않다.
문제는 이렇게 쌓은 역량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나누면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담당업무는 아니지만 답변할 수 있는 정도의 질문이라 답을 하기 시작한다. 친절하게 담당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지만 그 다음에도, 또 그 다음에도 질문은 당신에게 돌아온다. 당신은 이제 회사에서 온갖 업무의 질문받이가 됐다. 축하한다.
"○○씨한테 물어봐! 모르는 건 전부 ○○씨한테 물어보면 돼!"
당신은 이 대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웰컴 투 헬. 이와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경험은 동료들에게 내 업무가 아닌데도 내 업무로 오해해 질문을 받고, 심지어 내가 알면서도 답변을 회피한다는 오해를 받아서 이제는 해명까지 하고 다닌다는 하소연을 했을 때 동료들에게서 돌아온 답이었다.
"… 나도 지금까지 그 업무가 ○○씨 담당인 줄 알았는데…."
"… 나도…."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외부교육에서 질문이라도 하거나 유관기업 담당자와 통화 시 상대방을 만족시키는 답변을 했다면 사외에서도 당신은 질문받이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묻지 않은 부분까지 지레짐작해서 자세하고 친절하게 응대하지 마라. 담당업무가 아니라면 아는 내용이라도 담당자를 알려주는 선에서 끝내라. 답변하지 않아도 될 질문에 응대한 시간만큼 담당업무를 처리할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기억해라.
■ 회사에 오래 다니는 법 ③ : 모른다고 말하는 법을 배워라
"교육 듣지 말고 쉬다 오라고 하셨는데 관련 이슈 있으면 또 찾을 거 같아서 안 가겠다고 했어요."
"물어보면 모른다고 하면 되지."
두 명분의 일을 여덟 달 동안 맡고나니 제주도 교육에 가서 교육 받지 말고 쉬다 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거절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똑같은 제의를 받았지만 끝까지 거부했다. 답변봇으로 몇 년간 살았더니 피해의식이 생겨서 회사 돈으로 놀러가는 게 죽도록 싫었다. 세상에 공짜가 있을리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번아웃이 될 정도로 일했으니 돌이켜보면 공짜도 아니었다(그냥 다녀올걸).
교육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 듣지 않은 교육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해도 되는 일이었다. 심지어 임시로 맡은 업무를 복귀자에게 넘겨주는 과정에 있었으니 관련 이슈가 생겼을 때 알아봐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담당자였다. 하지만 내게 오는 질문에는 경계가 없었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내게 '모른다'는 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몰라도 답을 해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은 대규모 인사이동이 발생했을 때 폭발했다. 몇 달간 나는 그야말로 질문의 불꽃축제를 겪어야 했다. 업무 인수인계 과정에서 전임자가 모르쇠로 일관하자 전전임자, 전전전임자였던 나에게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내 업무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메신저에서는 질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게다가 당연하게도 내 담당업무와 관련한 질문들도 동시 진행되고 있었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하소연을 했더니 그날 오후에는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사실 이 같은 대참사의 원인은 질문을 한 사람에게도, 질문을 받은 사람에게도 없다. 전임자의 무책임 때문에 엉뚱한 사람들이 곤란을 겪게 된 것이다. 안타깝지만 인수인계는 전임자와 후임자 사이의 일이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전전임자나 전전전임자가 간섭해야 할 필요가 없다. 친절하지 말고, 모른다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다.
회사를 오래 다니고 싶다면 꼭 스텔스 모드를 켜고 움직여라. 성격이 지나치게 까칠해도, 업무이해도가 심하게 떨어져도, 업무능력이 띄어나도 눈에 띈다.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부분까지 책임지려고 무리하게 노력하지도 마라. 회사는 당신의 노력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고생 끝에 회사가 내게 돌려준 것은 일당백을 하는 직원이 있다는 이유로 소속부서에 필요한 인원 감축시키기, 점심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 가고 2명분의 일을 하고 번아웃이 와서 배려를 요구하는 사람에게 왜 야근도 없이 2명분의 일을 하던 사람이 1.5명분의 일을 못하겠다고 하냐는 다그침뿐이었다.
당신이 헌신한 만큼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면 진심으로 축하한다. 하지만 입사 후 관찰한 회사가 직원의 노력과 열정을 쥐어짜기만 하는 회사라면 절대 당신의 빛나는 모습을 회사에서 드러내지 마라. 그 에너지를 아끼고 아껴서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위해 쓰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