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퇴사는 좋은 것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준 건 어쩌면 아빠일지도 모른다. 수 년 전에 평생 동안 다니던 회사에서 퇴임한 뒤 아빠의 삶이 몹시 즐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아빠는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건강을 위해 헬스, 등산, 걷기 등의 운동을 매일 꾸준히 했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취미들도 두루두루 섭려하고 다녔다. 워낙 활동적인 분이시라 친구들과의 모임도 끊이지 않았다.
"나 아빠 보면서 은퇴 후의 삶에 대해 완전히 긍정하게 됐어."
나는 이 말을 주변 사람들에게 수시로 하고 다녔다. 너무 긍정적으로 바라본 탓일까. 나는 마흔 살이 되기도 전에 퇴사했다. 이직도 아니고 그냥 쌩백수가 됐다.
17년 동안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본가에 내려와 요양을 하는 와중에도 침대머리에 기대어 책을 읽으면서 방을 두리번거렸다. 아픈 와중에도 도무지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는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라는 행복한 탄성이 팡팡 터져나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백수 생활이 일 년 가까이 되어가는 지금도 전~혀 지겹지도 않고 매일이 바쁘고 내가 백수인 게 너무 좋다.
남들은 쉬면서 통장잔고가 떨어지는 걸 보면 걱정이 된다는데 이상하게 나는 그러지도 않았다. 백수가 된 이후로 돈을 얼마나 까먹었는지 계산해본 적도 없다. 예전처럼 큰 돈을 쓰는 일은 없지만, 온라인 장보기, 반찬 배달하기 등을 통해 생활비를 적지 않게 쓰고 있으니 적지 않은 돈이 지출됐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주식투자금을 뺀 적도 없고, 적금이나 예금을 해약하지도 않았다. 간간이 돌아오는 P2P투자 원금과 만기된 적금을 쪼개서 생활비로 쓰고 있기는 하다. 이게 다 떨어지면 그때서야 통장잔고가 비어가는 게 실감 나려나?
아무래도 나는 백수가 체질인가 보다. 문제는 남는 게 시간인 백수인 주제에 욕심이 많아서 하고 싶은 일들을 일 년 가까이 쉬는 동안에도 완수하지 못했다는 거다. 건강상의 이유로 활동할 수 없던 시기가 이따금 있기도 했지만, 그래도 백수인데… 욕심이 많다는 게 가장 주요한 원인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딱 일 년만 백수로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계획을 철회하기로 했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볼 때까지는 이 행복한 시간을 좀 더 누려봐야겠다. 대신 이번에는 욕심을 줄이고 차근차근 하나씩 해보려고 한다. 너무 욕심 부리면 또 머리가 아프니까.
"동호회도 업무 관련된 걸로 가입하는 거 아니예요?"
동호회나 가입해볼까라는 말에 팀장님에게서 돌아온 대답에 깜짝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쳐다보기만 했다. '팀장님이 본인의 희망사항을 말한 건가?',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정말 일에 미쳐 사는 줄로 알고 있구나.' 물론 그런 때가 있긴 했지만 업무 때문에 동호회 활동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참 워커홀릭이었을 때였다면 모르겠지만.
내가 워커홀릭인 줄 알고, 일을 좋아하니까 준 것뿐이라고 변명할 사람들에게 사실 나는 백수가 체질이었다고 말하면 과연 뭐라고 할까? 다들 일하기 싫다고 인절미떡처럼 눌러붙어 있으면서 어째서 그 안에 있는 나는 다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지 지금도 미스테리하다. 그리고 슬프다. 스스로도 그걸 몰라서 워커홀릭으로 살아왔던 나의 지난 시간들이 안타깝다. 일 좀 덜 하고 취미생활하며 살아도 괜찮았는데. 오늘은 그런 나를 잘 도닥여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