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는 나의 힘

by NULL
은퇴는 인생의 목표가 아니다.
은퇴자금으로 지금 수준의 경제력을 가지기 힘들고,
은퇴 후 하겠다는 꿈들을
바로 지금 실행할 수 있다.

- <나는 4시간만 일한다> 中


"저 퇴사할게요. 업무인수인계 준비는 2주 안에 마치고…."

"○○씨, 잠깐 나와봐."


퇴사 삼 년 전 처음 회사에 퇴사 의사를 밝혔을 때, 나는 한 시간 동안 붙들려 면담을 받아야 했다. 거의 대부분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었다. 지금까지 몇 차례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는데, 놀랍게도 내가 어떤 입장이었을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모두 알고 있었고 배려해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말했다. 덧붙여 정확하게 의사표명을 하지 않고 불쾌한 감정만 보이는 나에게 자신도 서운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리고 퇴사 이야기를 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말로 면담은 마무리됐다.


줄곧 생각해왔다는 말은 진심일 것이다. 정말 준비된 것처럼 끊임없이 말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퇴사를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꺼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몇 차례 대화를 시도하고 오해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퇴사하는 순간까지 결국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퇴사할 때 내가 한 말은 "고마웠어요."가 전부였다. 이 역시 진심이었다.


이대로 있으면 스트레스로 내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퇴사 의사를 밝힌 거였는데 한 시간의 면담 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일하고 있었다. '이게 뭐지?' 얼떨떨했다. 분명 퇴사하겠다고 했는데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그 뒤로 변화는 있었다. 업무공백이 생기면 무조건 내게 맡겨지던 일들이 다른 이들에게 배정되었고, 새로 업무분장을 할 때 처음으로 업무량이 줄었다.




"저 다음 인사이동 시기 때 부서이동 안 되면 퇴사할래요."


퇴사하기 전에 해볼 수 있는 건 모두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일 년만에 이 말을 했을 때 나는 회사에서 부서이동을 시켜주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사실상 퇴사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새로운 팀장님은 본인이 천천히 알아보겠다고 했지만, 일주일 뒤 처장님이 휴가에서 복귀하자마자 보고했다. 본인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처장님과 몇 차례 면담 후 이동을 희망하는 부서를 말했지만 아주 쉽게 묵살됐다.


"회사에서 ○○씨를 그 부서에서 박아두려고 하겠어요?"


내 말을 전해들은 동료 하나가 킥킥대며 답했다. 회사에서는 나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부서에 보내려고 할 건데 내가 희망하는 부서는 그런 부서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회사 행정인력을 크게 분류하자면 사무직과 기능직으로 나누는 분위기가 있었고, 내가 가고자 하는 부서는 기능직이 모여 있는 부서였다.


회사에서는 나를 보내고 싶어하는 부서가 있었다. 나는 그 부서가 아닌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부서로 가고 싶다고 말했고, 결국 차순위 부서로의 이동을 고려하는 것으로 합의됐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까? 마침 그 부서의 직원 한 명이 갑작스레 퇴사를 결정하면서 나의 부서이동은 예정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휴직 처리가 불가하다면 퇴사하려구요."


회사는 답변을 차일피일 미루고 흐지부지 넘기려는 것 같았다. 내가 답변을 채근하면 한 달 이상 대기해야 하는 대학병원의 진단서를 제출한다면 고려해보겠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나는 한 달 동안 기다릴 수 없으니 그냥 퇴사하겠다고 말했고, 더 알아보겠다는 말만 그 뒤로 몇 번을 더 들어야 했다. 회사에서 시간을 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처음 진단 받은 병원의 진단서를 첨부해 휴직 신청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합의 됐다. 전해들은 바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보니 휴직 신청을 받아주는 것에 대해 상부에서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휴직 신청서 결재 여부와 관계 없이 다음 달부터 휴가를 사용하고 더 이상 출근하지 않겠다고 했다. 퇴사 시 필요한 서류도 모두 마련해 팀장님에게 인계했다.


결국 돌아온 답변은 처음과 같았다. 대학병원의 진단서를 제출하라. 그걸 제출하면 확실히 승인해줄 것인가. 그에 대해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완고한 회사대표를 설득할 만한 최고의 자료가 필요했던 것뿐이다. 행정 절차 상에는 필요한 일이었지만, 어차피 여기서 치료를 받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병원에서 어떤 치료를 하고, 무엇 때문에 이 정도의 안정가료가 필요한지 기술해주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렇게 상세한 진단서를 적어주는 병원이 있던가?


나는 휴직 신청서가 반려되자마자 미리 작성해놓은 사직서를 상신했다. 정확히 2분 걸렸다.




회사가 나의 억지스러운 휴직 신청서를 받아줬다면, 하마터면 애사심이 생길 뻔했다고 주변 동료들과 우스갯소리를 했다. 매번 직원들의 반발을 받으며 무수한 피해자를 양성하는 엉망진창인 인사평가 체계를 끝끝내 고수하는, 직원을 감정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성비 좋은 톱니바퀴 취급 하는 회사에 더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평판과 평가가 불일치하는 공간에 더 머물다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최근 들은 소식에 따르면 이번에도 평가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절대평가로 바꾸자는 제안이 회사대표에 의해 완전히 묵살되었으며(당연하지. 개발업체에서도 뜯어말리는 걸 고집스럽게 밀고나간 게 본인이시니까.), 심지어 더 엉망인 방식으로 시행하는 역풍을 맞았다고 씁쓸해 했다. 대표는 연임이 결정됐고, 회사는 더 좋아지지 않을 예정이다. 깔끔하게 퇴사를 하고 나오지 않았다면 종종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며 치료기간이 더 길어질 뻔 했다.




퇴사 후 지금까지도 가끔 재입사하는 꿈을 꾼다. 처음에 나는 내가 회사에 다시 다니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꿈에서도 나는 항상 퇴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알았다. 이게 남자들이 재입대하는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는 걸. 나는 회사에 남아있기 위해 할 만큼 했고, 더 이상 미련이 없다. 퇴사하지 않았다면 하지 못했을 여러 즐거운 일들을 지금 하고 있다. 퇴사는 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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