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 중독자 Jul 23. 2021

사랑과 배움

죽음 연습 1

아침부터 영양제를 몽땅 꿀떡 삼키고 에릭 클랩튼의 전곡을 듣는다. 어떤 날은 쳇 베이커를 질리도록 듣고 또 어떤 날은 조앙 질베르토를 듣는다.  한국어 가사로 된 노래를 듣는 건 피곤하다. 언어가 자꾸 귀로 파고들고 멜로디가 마음을 간질거린달까? 어쩌다 7080 시절의 노래를 한 곡이라도 들을라쳐도 그날은 감정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릴 각오를 해야 한다. 난 분명 전생에도 한국에서 태어났을 거다. 죽음학의 대가 최준석 교수가 쓴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카르마 강의'라는 책에는 그런 내용이 나온다. 자신의 업을 소멸하기 위해선 같은 국적과 같이 살았던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고,  그래서 인간은 전생에 살았던 나라에 환생을 해서  전생에 가족을 이루거나 함께 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와 가장 가까운 부모, 배우자, 자녀 등은 살면서 카르마를 쌓을 일 순위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불가에서 출가할 땐 가족부터 두고 떠나는가?

저자는 더불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배움과 사랑'이라고 정의 내린다. ' 배움과 사랑 ' 이 두 가지 기제는 내가 이 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동일하다. 난 죽을 때까지 심플하게 두 가지를 위해 살아가기로 했다. 그 중 먼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사랑'  거창한가? 그것은 '감정'과는 다르다. 사랑을 추구한다고 해서 나와 내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봉사활동을 하거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원한다면 하시라. 하지만 그것으로 사랑, 그 거대하고 무한한 단어를 한정할 수 없다. 우린 타인을 간절히 원하거나 그리워하거나 안쓰러워 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등의 매일 수시로 드는 감정의 행위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감정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오감의 감각들이다. 사랑은 굳이 표현되지 않고 녹아 있을 수도 의식 안에 고여있을 수도 있다.

문득 흘러나오는 에릭 클랩튼의 '원더풀 투나잇'을 들으며 가슴이 녹아내릴 듯 감동을 받았다면 그것도 사랑이다. 내게 사랑의 정의는 합일이다. 무언가에 녹아들어 가는 것, 그것이 노래가 되었듯, 사람이 되었든, 종교가 되었든, 애완견이 되었든, 그것은 내가 없어지고 대상과의 합일이 되는 행위 혹은 합일의 경험이다. 그 찰나의 순간, 사랑하는 순간은 너무도 짧게 지나가고 너무도 강렬해서 우리는 그것을 부정한다. 하지만 인생을 살며 합일의 경험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그것이 언제 어느 때가 되었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평생을 살며 너무도 강렬해서 잊히지 않는 경험, 그것은 분명 사랑 혹은 합일을 경험한 기억일 확률이 높다.


인도, 푸나 아쉬람 로즈 가든에서 미스틱 로즈라는 명상을 시작한 지 삼 주째 되던 어느 날이었다. 미스틱 로즈 명상은 오쇼 라즈니쉬가 만든 삼 주간 매일 세 시간씩 하는 명상으로 첫 주 세 시간은 혼을 빼도록 웃다가 둘째 주 세 시간은 세상 슬프게 울고 마지막 한 주는 매일 세 시간씩 좌선을 하며 침묵에 들어가는 명상이다. 두 주를 웃고 울어서 감정과 육체를 정화시킨 후 삼 주째 로즈 가든 ( 스승의 산책로 )에 앉아 좌선을 하며 침묵 명상을 했다. 귓가로 새소리가 들리고 나뭇잎이 소곤대더니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고요한 아침이었다. 문득 순간의 찰나 그 아침 정원의 나무와 꽃과 새와 햇살과 어우러지던 나의 의식은 어느덧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나는 분명 눈을 감고 앉아있었지만 새도 나뭇잎도 햇살도 졸졸 흘러내리던 물줄기도 나의 의식과 어우러져 넘나들었다. 내가 녹아 없어지는 경험 그 순간의 몰입이 강렬히 나를 사로잡았던 경험은 너무도 생생해서 지금도 고스란히 복기해내고는 한다. 아쉬우건 경험에 대한 기억이어서 살아있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사랑이다. 내가 없어지는 경험, 나의 에고가, 나의 자의식이 없어지고 의식이 대상에게 녹아들어 가는 상황은 우리가 육체를 벗고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과 같은 결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아있는 동안, 진리를 탐구하고 죽음을 연습하는 삶은 내 생의 목적이자 영원의 시간을 위해 준비해 가야 할 방향이다. 나는 그렇게 '사랑과 배움'을 통해 매일을 자신을 갈고닦는 도인처럼 살다가 때가 되면  흔쾌히 떠날 것이다.

' 이 생에 소풍 온 것 처럼 놀다가 떠난 ' 어느 시인처럼 말이다. ^^

매거진의 이전글 오래된 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