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가 연휴 동안 동남아 휴양지에 다녀왔다. 휴가 쓴 사람치곤 표정이 미묘하다.
"5개월짜리 애를 데려갔는데, 평소에 잘 자거든요. 근데 비행기에서 계속 우는 거예요. 여섯 시간 내내 계속 서서 안아줬다니까요. 이게 휴가가 아니고 무슨 극기훈련이지.."
"난 시카고에서 인천까지 비행기에서 열네 시간 내내 우는 생후 2개월짜리 신생아를 데리고 온 적이 있어요. 옆에 28개월짜리 애도 같이 태워서요. 제 경우만 하겠어요."
물론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사실이긴 하지만.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첫째 아이만 해도 그렇다. 처음으로 영어 듣기 평가라는 걸 연습하느라 멘붕이 온 모양이다.
"엄마, 이십 분이나 영어 듣기 평가를 했어요! 집중하느라 너무 힘들어요."
"토익 듣기 평가는 사십오 분이란다. 영어 듣기 평가 나도 다 해봤어. 다들 힘들단다. “
최대한 뇌에 힘을 준 결과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이 나이쯤 되면 안 해본 게 별로 없다. 젊은 친구들이 뭔 이야기를 해도, 공감이 되기보단 다 내가 해봤더니 별거 아니더라는 소감뿐이다. 요새 유행이라는 Y2K 패션은, 그 시절에 쫄티와 통바지 입고 활보했다. 미국 시골까지 가서 독박육아의 끝을 봤다.
이래가지곤 위험하다. 머릿속에서 라테 경보가 울렸다. 남이 공감을 바라고 한 이야기에 내 경험을 말해봤자 무슨 도움이 될까.
"아, 나는 수메르 선배와 비교하면 배부른 소리를 했구나. 육아가 힘들다고 불평하지 말아야겠다."
"엄마에 비하면 나는 새발의 피야. 더욱 노력해야지."
이럴리는 없지 않은가.
스스로에게도 위험한 일이다. 매사에 감흥이 없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하루에 한 가지씩 안 해본 일 하자고 결심한 지 좀 됐다. 안 다니던 길로 가보기도 하고. 가장 쉬운 건 처음 가는 식당에서 먹는 거다. 어차피 매일 끼니는 챙겨야 하니까. 틈나면 주변에 신상 맛집이 있나 검색해 본다. 결혼기념일에는 미슐랭 별이 있는 곳에 가는 걸 원칙으로 한다.
문제가 뭐냐면, 경험의 비가역성 때문에 한번 좋은데 가면 기준이 거기 맞춰진다는 거다. 그 이하의 음식은 맛이 없다. 예전에 맛있게 먹었어도 이젠 아니다. 맛있다고 느끼려면 진짜 비싸고 좋은 데 가야 한다. 심지어 비싸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싼 건 이유가 있지만 비싼 건 이유가 없기도 하다.
젊을 때는 모든 것이 다 처음이어서 경험 자체로 만족이 컸다. 이젠 경험의 질을 따지지 않으면 시큰둥한 나이가 되어버렸다. 윤여정 배우는 "나는 67살이 처음이야. 우린 매일을 처음 사는 거야."라고 했다. 아직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많을 거다. 스스로 다 해봤다고 여기고 찾지 않는 걸까. 아니면 원하는 게 있어도 신포도라 여기고 일찌감치 포기해 버린 걸까. 늦었다고 생각될 때는 진짜 늦은 거다. 지금은 늦지 않았다. 아직 안 살아본 나이가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