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갱년기
둘째 아이는 몇 달 전부터 2차 성징이 오기 시작했다. 예민하고 깐깐한 아이인지라 하나하나 실시간으로 중계를 해준다.
"엄마! 옆에서 보니 가슴이 일자가 아니라 살짝 튀어나왔어요!"
"엄마! 가슴이 옷에 스쳐서 아파요!"
"엄마! 브라 없이 티셔츠만 입는 건 창피해요!"
"엄마! 브라를 입으니까 불편해요!"
"엄마!"
"엄마!"
"엄마!"
최근 새로운 레퍼토리가 등장했다.
"엄마! 팬티가 축축해요."
"설마 쉬 한 거니?"
"아닌데...."
빠르면 몇 달 후에 초경을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중1 때였다. 확실히 요새 아이들이 빠르다. 겨드랑이에도 멍울이 잡힌단다. 언니가 겨드랑이 털이 났을 땐 징그럽다며 놀려댔었다. 이젠 첫째가 반격할 차례다. 둘째는 옛날 일은 생각도 못하고 나에게 항의를 한다. 사적 제재를 전면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방관자의 자세로 모른 척하기로 한다.
첫째는 사춘기가 진행 중이다. 정점이라는 중2병을 향해 가고 있다.
초경 때는 별 내색을 안 하고 넘어갔다. 부탁을 한 건 딱 두 번이었다. 주니어 브라를 사달라고 한 것과, 생리대를 달라고 한 때였다. 그런 첫째 아이도 초경하던 때는 무척 상심해 있었다. 뛰어다니고 운동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얼마나 불편하고 번거롭겠는가. 평생을 매달 일주일 동안 축축하고 불편한 걸 해야 한다는 것이 확정되는 순간, 눈빛에는 절망이 비쳤다.
내가 어릴 때 생리는 쉬쉬하며 부끄러워하던 것이었다. 생리대를 사러 가면 누가 볼세라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주었다. (요새도 종이봉투나 비닐봉지에 따로 넣어주는 곳이 있긴 하다)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다. 인체의 자연스러운 현상 중 하나니까. 첫째의 초경을 알게 되자 한껏 신나는 목소리를 만들어서 말했다.
"너는 이제 2.0으로 업그레이드된 거야! 축하할 일이지!"
"엄마, 저 다시 1.0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안타깝게도 인생에 되돌아감은 없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사춘기가 오자 첫째는 사나워졌다. 평생을 둘째 기에 눌려 양보하던 순한 아이였는데, 이런 면이 있었네 하고 놀랐다. 입도 걸어지고 동생과 꽤 많이 토닥인다. 약간 선을 넘을 때도 있다. 지금까지 동생에게 당한 걸 감안하면 조금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일단 놔두기로 한다. 둘 사이의 말싸움도 점점 정교해진다. 상대가 뭐를 잘못했는지 조목조목 근거를 든다. 그러다가 말꼬리를 잡고 언성을 높인다. 어른의 싸움을 닮아간다. 정도가 심하다 싶을 땐 개입한다.
"너희 싸우니?"
"하, 하, 하, 저희 노는 건데요?"
혼나지 않으려 슬쩍 넘어가려는 게 의뭉스럽다.
둘째에게도 초경이 즐거운 일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다. 그날이 오면 축하의 의미로 선물을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초경 생각에 의기소침해 있다가 선물소리에 금세 반색하는 걸 보니 아이는 맞나 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나는 이제 갱년기를 앞두고 있다.
재작년, 갑자기 월경량이 폭증했었다. 팬티형 생리대를 입고 자도 감당이 안됐다. 자다가 몇 번 일어나서 갈아입어야 했다. 산부인과에서 검사해 보니 자궁근종이 몇 개 보였다. 의사는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몇 년 뒤면 어차피 폐경이니 피임용 루프를 끼시는 게 어때요? 수술 이런 건 위험하기도 하고... 근종이 심한 정도는 아니라서, 월경과다만 해결하면 되는 거잖아요."
갱년기를 앞둔 여성만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라고 잘됐다는 듯이 들렸다.
내 아이들이 앞으로 다가올 변화를 두려워하듯 나도 그렇다. 한 인터뷰에서 배우 윤여정 씨가 67세는 처음 살다본다고 했다. 나도 갱년기는 처음이다. 신체적 변화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어진다고 들었다. 갱년기는 질병 또는 노화에 의해 난소기능과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감소하는 게 원인이다. 안면홍조, 발한, 수면장애, 두통, 어지럼증, 건망증, 관절염, 근육통 같은 신체 변화와, 신경질, 우울감 등의 심리적 변화를 겪는다고 한다. 인생의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생각하고 현명하게 넘기고 싶다.
그래서 애들에게 미리 선전포고를 해 놓았다.
"니들이 아무리 사춘기니 중2병이니 해도 엄마 갱년기는 못 이길 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