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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메르인 Aug 26. 2022

그녀의 전생은 무엇이었길래 이토록 고달픈가

고등학교 동창 K는 가질 수 없는 남자만 갈망했다.


대학생 때 좋아한 턱이 각진 미국 팝가수 A는 커밍아웃을 하고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두었으며, 눈여겨본 모 아이돌 그룹의 눈이 큰 멤버 B도 게이설이 솔솔 돌고 있고, 호감이 간다고 한 선한 인상의 모 배우 C 역시 마흔이 넘도록 싱글이다.


그 때문인지 K는 변변한 연애 한 번 못해보고 학생 시절을 마감하게 된다. 그래도 모 기업에 취직하자마자 입사 동기 M과 사귀게 되었다. M은 K와 동갑으로, 홀아버지에 무직에 미혼인 여동생 둘을 두고 지방에서 상경한 전형적인 개룡남('개천에서 용 난 남자') 타입이었다. 반면 K는 부부공무원인 부모님 밑에서 별 금전적인 어려움 없이 자란 서울 토박이다.


그 이후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M이 K를 연애 대상으로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본인의 집안을 서포트할 며느리 감으로 더욱 끌린 것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K는 맏며느리 같은 인상이긴 했다. 중간에 헤어질 위기가 있었으나(K가 울면서 매달렸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결혼에 이른다. 공무원 은퇴 후 경기도 모 처에 전원주택을 장만하여 살고 있는 K의 부모는 반대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K 부부는 박봉을 쪼개 시댁 식구들을 계속 금전적으로 부양해야 했으며, M은 노골적으로 시댁을 챙겨주기를 바랐다. 회사 업무 특성상 둘은 근무지가 몇 년을 주기로 계속 바뀌었다. 둘 중 하나라도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한 대부분의 기간을 따로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둘은 딸 하나를 낳고, 몇 년 뒤 또 딸을 낳았다. 두 딸의 육아는 오롯이 K의 몫이었다.


둘의 사이가 소원해질 대로 소원할 즈음, K는 M이 회사 여후배와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혼까지 생각했으나, 예상치 않게 늦둥이 셋째가 생겨버려 흐지부지 되었다. 셋째도 딸이었다.


홀로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육아휴직을 반복하다 보니, K는 업무성적이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동기보다 승진이 늦었다. 인사위원회에서는 '남편이 작년에 승진했는데, 자기까지 승진하려고 하니 욕심이 너무 심하다'는 말도 나왔다. 회사 사람들은 K를 남편 M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비교적 잘 나가는 M 때문에 K는 뒷전으로 밀리곤 했다.


지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처지다 보니, K는 곧 고등학교에 입학할 첫째 딸의 대학 입시 준비가 걱정이 되었다. 마침 경기도에 사는 부모님의 지역에서는 1년만 거주하면 특별 전형으로 자사고에 지원할 수 있었다. 첫째는 한시적으로 부모님에게 보냈다. 사춘기 딸과 황혼의 부모님은 매일같이 투닥거린다고 했다. K는 각각 초등학교 고학년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나머지 두 딸만 데리고 살고 있다.


언니의 결혼생활 때문은 아니겠지만, 바로 아래 여동생은 사십 대 중반에 비혼을 고수하고 있으며, 막내는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수녀가 되었다.




워킹맘은 항상 고단하다.


직장인, 엄마, 아내, 며느리, 학부모 등 여러 가지 요구되는 역할을 수행하다 보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다. 행복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보람을 느낄 때도 많다. 하루하루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일과 가정을 양립하는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다. 어떤 워킹맘은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 만족할 수도 있고 불만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한가하지는 않다. 많은 워킹맘들이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린다.


"우리는 전생에 뭐였기에 이렇게 이번 생이 고단할까.."

"뭐 친일이라도 했나?"

"아이, 뭐 순사 이런 건 아니고. 가벼운 부역 정도 한 건 아닐까?"


이유라도 좀 알고 싶은 거다. 꼭 그렇게 믿는다기 보다는, 자조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이다. 그래도 K는 전생에 이완용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래간만에 K에게 연락했다.


"잘 지내?"

"나 미국으로 한 달간 출장을 가게 되었어."

"애들은 그동안 누가 돌봐주고?"

"낮에는 지들끼리 있고, 밤에는 동생이 와주기로 했어. 주말엔 부모님이 오시기로 했고"


첫째가 학교에 가야 하니 부모님이 주중에는 못 오시는 것 같았다. 동생도 직장이 있으니 한 달 내내 휴가를 낼 수는 없을게다. 남편 M은 작년에 경상남도 모 처로 전근 갔다고 들었다. 낮 동안 아이들을 본의 아니게 '방치'해야 하는 K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안 그래도 평소에 아이들을 잘 챙겨주지 못해서 좋은 엄마가 못 된다고 고민하고 있는데.


"어떡하냐, 걱정되겠다."

"불안하긴 한데... 어쩌겠어. 나는 전생에 나라를 팔았잖아"






Cover Photo by Marten Bjork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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