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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메르인 Oct 22. 2022

추석 명절엔 무장해제

우리들-아줌마들-이 모두 숙제라고 부르는 그것, 시댁 방문을 추석 명절 당일 전에 끝냈으니, 후련한 마음으로 친정에 정오 무렵까지 가서 점심식사를 먹고 오기로 했다. '식당은 어디로 알아볼까요..?'하고 넌지시 물었지만, 집으로 오라는 짤막한 답이 돌아왔다. 엄마가 밥을 해놓으시겠다는 말이다, 재수 좋은데?


어저께 시댁에서 늦게 집에 돌아온 탓도 있겠지만, 친정에 간다고 생각하니 이미 흐물흐물 게을러져, 아홉 시가 넘어서야 건홍합, 콩나물, 단호박, 표고버섯 등을 넣은 영양밥을 차려냈다. 시댁에서 많이 먹은 여파가 있어 나는 식사를 걸렀다. 점심을 푸짐하게 먹을 마음가짐이기도 했다. 추석이라 다들 고향에 갔지 싶어, 시내는 한산할 테고, 이십 분이면 친정이 있는 XX동에 도착했던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열두 시 반에 간다고 카톡 메시지를 날렸다. 


열두 시가 넘어 집을 나섰으나, 초반부터 차량 흐름이 두터운 것이 심상치 않았다. 올림픽대로에 진입하자 온전히 정체라고 부를 수준에 이르렀다. 약속시간인 열두 시 반까지는 벌써 십 분밖에 남지 않았다. 가볍게 '차가 막히네요'라고 카톡 메시지를 날렸다. '알았어'라는 역시 건조한 답이 돌아왔다. 엄마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런 종류의 일정 변경에는 둔감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크게 초조하지 않았다. 차라리 남편과의 약속이면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친정이 있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해서도, 상가에 들러 용돈 드릴 현금을 인출하고, 빈손으로 가지 않게 샤인 머스크 한 상자를 사고 나니 이미 한시였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제법 큰 상은 차린 지 좀 된 듯, 메인 요리들은 뚜껑을 대신해 티슈가 덮여 있었다. 엘에이 갈비, 잡채, 생선 전 등 삼십여 년 넘게 먹어서 입에 넣기도 전에 이미 다 먹은 것 같은 요리들이 기억을 소환했다. 아침을 거른 탓인지 밥은 맛있게, 그리고 이건 좀 성급한데..? 라며 입으로 들어갔다. 밥이 몇 숟갈 남지 않자 머리로는 이제 그만 먹어야 하는 걸 알았지만 멈춰지지 않았다. 


식욕이라는 건 추구할수록 더 갈급한 것인지, 기름진 음식으로 배가 부르자 단 것으로 입가심을 하고 싶어졌다. '단 거 없어요?, 송편은요?'라고 묻자 엄마가 사과와 자두를 손질해서 내오고 냉동고에 있던 송편을 데우기 시작했다. 애초 과일 같은 천연의 당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오래되어 굳은 미니 초코바 두 개를 찾아서, 껍질을 공들여 벗겼다. 간에 기별이 가지 않고 감질만 났다. '뭐 단거, 케이크, 과자 이런 거 없나?'라고 요구하자, 엄마가 김치냉장고 구석에서 꽈배기를 찾아왔다. 찬걸 그냥 먹으라는 얼마를 졸라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송편, 사과, 자두, 꽈배기를 꾸역꾸역 밀어 넣자 속에서 신물이 나기 시작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연어만 회귀본능이 있는 것이 아닌지라, 친정에 돌아오자 결혼 십여 년 동안 후천적으로 갈고닦은 부지런함과 절제함이 용수철이 돌아오듯 한달음에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엄마가 스스로 설거지하는 것을 알면서도 빈말이라도 대신한다 하지 않았고,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을 디테일하게 요구했다. 애들은 부모님이 좀 놀아주라고, 윶놀이라도 하라고 자는 아빠까지 깨웠다. 과식에 지쳐 무한도전 재방송을 보다가 소파 구석에서 선잠이 들자, 엄마의 권유대로 안방에 들어가서 계속 잤다. 내가 봐도 좀 무례했다.


그러니까, 나도 좀 비뚤어지고 싶은 거였다. 내가 비뚤어져도 오냐오냐 받아줄, 말 그대로 엄마 같은 존재가 반가웠던 거다. 왜냐하면 평소에는 내가 그런 존재니까.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은 고단한 일이니까.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이 어질러놓은 물건들을 주섬주섬 제자리에 놓고, 정리 안 한다고 잔소리하는, 엄마 모드로 다시 무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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