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만에 살던 동네를 다시 방문하다
세상일은 대부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삼 년간의 홍콩생활을 뒤로하면서, 맘만 먹으면 언제든 다시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때맞춰 터진 코로나19 사태로 홍콩은 몇 년간 강력하게 락다운을 시행했고, 홍콩 방문은 요원해졌다. 결국 다시 가게 된 건 몇 년 만이었다.
락다운이 풀린 후 가장 큰 걸림돌은 아이들의 시간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졌다. 학원은 방학 때도 쉬지 않았다. 학원들의 각기 다른 휴원일자를 요리조리 짜내서 겨우 3박 4일의 시간을 쥐어짜 냈다.
살던 동네로 여행 가니 준비할 게 없었다. 호텔은 예전에 살던 타이쿠싱에 있는 이스트호텔로 정했다. 어디 갈지 적당한 동선만 짜두면 되니 편리했다. 환전을 위해 현지에서 바로 홍콩달러를 인출할 수 있는 트래블카드를 발급한 게 다였다.
배를 타고 가까운 섬에 가보고, 즐겨 찾던 식당에 들르고, 아이들의 친구들과 만나고, 귀국 이후 새로 생긴 서구룡문화지구의 현대미술관인 엠플러스 정도 가볼까 하는 느슨한 계획이었다.
홍콩 첵랍콕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그간 잊고 있었던 익숙함이 훅 하고 다가왔다. 비행기에서 내려 A 혹은 B 출구로 나오면 가운데 넓은 통로를 지나 오른쪽으로 꺾는다. 경사로로 내려가면 공항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A12번 버스를 타고 타이쿠싱 시티플라자에서 내린다. 낯선 환경이 주는 긴장감과 짜릿함은 없지만, 여행 지면서도 여행지가 아닌 장소가 주는 안락감은 그 자체로 새로웠다.
공항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크리스털제이드(탄탄면), 호흥키(완탕면) 등 알만한 프랜차이즈가 포진해 있어 대충 어디를 골라도 현지의 맛이 난다. 남편은 탄탄면을 한 젓갈 먹고선 "바로 이 맛이야!"라는 다시다 광고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들어오자 늦은 오후였다. 살던 동네에 오랜만에 돌아오니 낯섦이 점차 익숙함으로 변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 장소를 보니 기억이 새로 새록 살아나는 게 신기했다. 그 와중에 아이의 추억이 담긴 와플가게는 없어져버린게 아쉬웠달까.
여행 첫날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 센트럴 구경을 하고 딤섬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고 센트럴역에 내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기까지 꽤 걷는 여정이었다. 나의 패착은 욕심을 많이 부린 거였다. 며칠 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 네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와 파김치가 된 사춘기의 아이들은 피곤해서 입이 댓발로 나왔다. 택시를 타고 갔었어야 했다.
원딤섬이라는 딤섬집에 갔다. 맛은 무난했다. 리뷰는 좋았는데 가성비 있는 현지의 맛이었다. 관광객들은 괜찮을지도. 나야 온갖 딤섬을 다 먹어봐서 눈이 높아졌나 보다.
둘째 날 아침, 호텔 조식 대신 현지식을 먹기로 했다. 홍콩은 집이 좁고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아침식사를 밖에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호텔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멘와빙텅에 갔다.
홍콩의 빙셧 체인점 중 하나다. 빙셧은 홍콩의 전통적인 서양식 패스트푸드라고 보면 된다. 메뉴는 서양식의 기묘한 조합이다. 토스트, 스크램블에그, 밀크티를 기본으로 하고 인스턴트 소고기라면을 곁들이기도 한다. 탄수화물 비중이 높아 건강에 좋아 보이진 않는다. 점심, 저녁에는 볶음밥 등 주문할 수 있는 메뉴가 늘어난다.
아침식사를 하고 사이완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동룡도에 갈 계획이었다. 호텔을 나서자 세찬 비가 들이붓기 시작했다. 이 날씨에 배를 타기엔 무리라고 판단, 호텔로 돌아왔다. 옷과 신발이 젖어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녁까지 호텔에서 좀 쉬기로 했다. 아이들은 와이파이와 함께라면 세상 어디에 있어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아이들과 친했던 자매의 집에 놀러 가서 같이 저녁식사를 했다. 센트럴 IFC몰 안에 위치한 고급 슈퍼인 시티슈퍼에서 와인 한 병을 사 들고 갔다. 친구들이 좋아한다는 잔망루피와 뉴진스의 캐릭터 상품, 홍콩에서 구할 수 없는 다양한 버전의 불닭볶음면은 한국에서 챙겨 온 터였다.
오랜만에 영어로 대화해야 하므로 예전에 그랬듯이 가자마자 위에 와인을 들이부었다. 알코올의 힘을 빌리자 엉터리 영어가 술술 나왔다. 아이들은 하룻밤 자게 두고 왔다. 새벽까지 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고 즐겁게 놀았던 모양이었다.
해피밸리의 예만방 등 코로나를 겪으며 많은 식당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 자리를 새 식당들이 메웠으리라. 리틀바오도 그중 하나다. 햄버거를 홍콩식으로 재해석했다. 빵은 홍콩식 찐빵인 바오번이고, 패티도 현지의 맛을 가미했다. 색다른 홍콩 음식을 경험하고 싶다면 강력 추천한다.
비가 계속 와서 서구룡문화지구의 현대미술관인 엠플러스에 갈 명분이 충분했다. 나야 찬찬히 둘러보고 싶었지만 미술관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은 호응이 없었다. 가족과 함께 여행 가면 서로의 취향을 조율하기가 쉽지 않다.
저녁식사는 호텔 근처 레스토랑에서 베이징덕을 먹었다. 포비든덕이라는 식당이다. 타이쿠싱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 재개발 지역인 타이쿠 플레이스 오피스빌딩에 위치해 있다. 가격대가 좀 있지만 맛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더 싸고 맛있는 식당이 분명 존재할 거다. 우리 가족이라면 굳이 관광지의 식당을 찾아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사춘기 자녀와 여행한다면 어느 정도 타협이 필요하다. 돈은 아끼지 않고, 시간과 힘은 절약하고, 기대치는 낮추는 거다.
마지막날은 딤섬 앙코르였다. 공항철도를 탈 계획이었기 때문에 센트럴역의 팀호완을 가는 게 동선이 좋았다. 언제라도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면서 귀국행 비행기를 탔다. 홍콩은 언제라도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 줄 것임을 알기에 떠나도 아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