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진창 소나무
엉망진창 소나무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은 엉망진창인 날들입니다.
비가 와서, 해가 뜨거워서, 하늘이 예뻐서라고 핑계를 대며 하루를 망쳐버리고 있습니다.
스스로 정했던 그 많은 규칙들을 하나씩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일찍 잠들고 일찍 일어나지 않습니다.
새벽 네시쯤에야 잠들어 아홉시 넘어 부시시 일어나고도 침대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 눈을 떴을까 홀로 원망만 하고 있습니다.
일곱 시에 맞춰둔 알람은 왜 아직도 해제하지 않고 있는지.
게으름인지 미련인지 아리송합니다.
식사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밀가루는 입에도 안대고 하루 한끼를 정량으로 정해 살았는데
이젠 먹고 싶으면 먹습니다.
다행이라고 할 점은 먹고 싶을 때가 별로 없다는 것인데
다행스럽지 못한 점은 기껏 먹고 싶은 음식은 대부분 편의점 음식이나 배달로 오는 중국요리와 햄버거 따위란 것입니다.
때문인지 요즘 속이 좋지 않습니다. 종일 더부룩하고 화장실에서도 고생을 하고 있지요
조금만 더 지나면 예전 지병처럼 달고 살던 변비가 심각해지지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운동이요?
운동이라뇨. 귀찮고 힘들어 졌습니다.
몸을 못만들면 어떻고 배가 좀 나오면 어때요.
좀 덜 건강하면 어때요. 별 다를 게 있나요.
K
당신에 대한 그리움을 받아들이는 모습도 잃었습니다.
당신의 흔적을 어루만지며 아파하고 눈물짓던 하루의 나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피해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침대가 좋습니다.
내가 가진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고급 매트리스도 아니고 감촉이 좋은 이불도 아니고 나에게 딱 맞는 베개도 아닌데
나는 그냥 침대가 좋습니다.
내 몸 위로 반쯤 걸쳐 덮은 이불로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눈을 뜨면 깨어있는 것이고 눈을 감으면 잠들어 있는
아무것도 아닌 침대 위의 내가 좋습니다.
내 하루는 그렇게 엉망진창의 결과물로 침대 위에 뉘어져 있습니다.
엉망진창인 하루는 내일 더욱 크나큰 엉망진창을 만들걸 뻔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하루하루가 조금만 더 모이면 내 삶 자체도 엉망진창이 되어 갈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알면 뭐할까요.
얻고자 하는게 없는데 잃으면 어떤가요.
더 이상 잃을게 있는지도 모르겠는걸요.
침대 위로 살아있지 않은 사람처럼 뿌리박힌 나는
마치 어느 바닷가 암초 위로 뿌리내린 소나무 같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땅 위로 자리잡아
먹을 것도 없어 간간히 내리는 비로 간신히 목을 축이고
매일 같이 불어오는 해풍을 견디며
짝을 찾기려 날려보낸 송화가루는 번번히 파도에 가로막히지요
그 자리에 있기에 그저 살아가는 암초 위의 소나무는
그럼에도 그러려니 석양을 바라봅니다.
석양을 바라보는 그 소나무는
그가 자리잡은 암초를 나의 침대와 같이 여기고 있을까요
K
또 한편으로 이 편지가 당신에게 날려보내는 나의 송화가루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십. 수백의 편지를 적어도 결코 당신에게 닿지 못하는 모습이 무척 닮은것 같아서요.
쓴웃음이 나네요.
조만간 바다를 가게 된다면 암초 위로 자라난 소나무를 찾아봐야겠습니다.
안녕. 인사를 건내고 지금과 같은 쓴웃음을 서로 마주하기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