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그 바다

아흔세 번째 밤

by 숨결
양양. 그 바다




저에게 있어 바다는 계절과는 연결지음 없이 마음의 고향이자 요람과도 같은 곳입니다.

언제부턴가 여름에는 바다를 가야한다는 고정관념은 지워져버렸고 여름이란 계절의 특별함도 함께 옅어졌습니다. 아마도 고되고 궁핍한 내 삶이 한 몫한 노릇입니다. 계절에 맞춰 어딘가로 떠날 수 있는 사치는 저에겐 너무나도 비싼일이니까요


올해도 여행이나 휴가에 대해서는 특별한 목적도 계획도 없이 시작했었는데 우연찮게 올해 초 대학 동기 다섯명과 집들이겸 술 한잔 기울이다 모임을 하나 만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점점 나이들어 갈 수록 얼마나 만남을 가질까. 세월이 흐를 수록 서로 멀어져만 가는 걸 가만히 두고보지는 말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3개월에 한번씩 의무적이고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자 약속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하여 조금 더 특별하게 여섯명이 한번씩 모임장의 역할을 맡아 모임의 주제를 정하고 나머지 친구들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도록 규칙을 정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모임의 첫번째 주제는 '양양에서 서핑'이었습니다.


양양


그리 대단한 추억이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K 당신과 두번인가 겨우 갔었던가요.

헌데 당신과의 헤어짐 이후 당신의 흔적을 되짚어보겠다며 찾았던 곳이 속초, 양양이었던 것이 저의 기억에 큰 영향을 미쳤나봅니다. 복습효과라는 것이 이런데에서 효과를 발휘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요. 양양 바다를 떠올리면 당연하다는 듯 당신이 떠올라버립니다. 때문에 모임 장소가 양양으로 정해지자 나는 당신이 떠올라 버렸습니다.


땅의 기억이라 부를까요.

장소에 남겨진 기억은 머리와 가슴에 남은 기억보다 더욱 선명하고 튼튼하게 뿌리를 내려둡니다.

이제는 분명 하루의 일상속에서조차 쉽사리 당신을 떠올리거나 연관지어지지 않건만 당신과의 추억이 남겨진 땅들은 어찌해 나를 대신하여 당신과 나를 기억하고 있는지 참으로 원망스럽습니다.


나는 그래도 많이 강해졌나봅니다.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라 버린 당신의 얼굴에 아파하고 도망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참 대견합니다.

대신에 나는 어떻게 하면 양양에 뿌리 깊게 그려진 당신의 이름과 얼굴을 지워낼 수 있을까 고민해봅니다.

땅 속에 스며들듯 그려진 당신의 얼굴을 지워내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나는 당신의 얼굴 위로 새로운 얼굴과 이름을 덮어 그려보아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리운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잊는듯이요.


이번 친구들과의 모임으로 얇게 한층 당신을 덮고, 새로운 사랑과도 양양을 찾아 조금은 두텁게 당신을 덮어보겠습니다. 아무리 애를 쓴다하여도 어느 한 구석 당신의 흔적은 분명 남을 테지만, 내 남은 시간들 찾게 될 양양에 당신이 아닌 기억들로 당신을 덮어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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