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 없는 아름다움
삶의 어느 순간에는,
나 반드시 저곳에 있으리라.
종종 사진 딱 한 장으로 까마득하게 머나먼 곳을 앓기 시작한다. 본능에 가까운 강렬한 끌림. 우유니는 그런 여행지들 중에 하나였다. 고등학생 때 본 그 사진은 온통 눈부시게 파랗고 희었다. 새파란 하늘 끝에 순백의 뭉게구름이 낮게 떠다니는 곳. 지평선인가 수평선을 간신히 남겨두고 더없이 투명한 거울 같은 게 하늘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세상 이전의 세상을 엿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유니 때문에 볼리비아라는 나라를 알았고, 모래가 없는 사막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사진 속 그곳을 찾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년. 버킷리스트에서 또 하나를 지웠다.
동이 틀 무렵 비행기를 탔는데 우유니에 내리자마자 내리 꽂히는 햇빛이 강렬했다. 지구에서 가장 큰 소금사막을 만들어낸 태양의 열기였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택시로 20분이 조금 안 걸렸다. 다 낡아빠진 차로 길 같지 않은 길을 달리니 마을이 나왔다.
힘들다는 우유니 투어 전 조금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고, 투어 예약도 수월하게 할 겸 라파즈를 하루 줄인 일정이었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일행보다 일찍 도착해서 낮잠을 늘어지게 잤는데도, 지대가 높아서 쉬는 게 쉬는 것 같지 않았다. 칠레로 넘어가는 버스표를 알아보고, 현금을 뽑고, 동네를 한 바퀴보다도 더 돌았는데 시간이 가질 않았다.
별 볼일 없는 동네였다. 타임머신을 타고 십 년도 더 뒤로 달려온 느낌이 들 만큼, 한참 예전의 쇠락한 시골 느낌이 났다. 늑대 같은 개들이 거리 온 거리에 산적한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우르르 쏘다녔지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 부서져가는 건물에서도 사람들이 멀쩡히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 건물들 사이로 드문드문 갓 페인트 칠을 한 듯한 원색의 건물들이 덩그러니 서서 한낮의 태양을 빨아들였다.
도시의 행색이 대체로 남루했으나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길거리 음식, 샴푸, 린스, 학용품 따위의 공산품을 파는 커다란 장이 섰다. 한쪽에서는 알록달록한 관람차가 돌았고, 사행성 오락도 한창이었다. 골목은 북적거리는 사람들로 꽤 어수선했다. 우유니라는 도시가 곧 128번째 생일을 맞기 때문에 잔치를 벌이는 거라고 했다.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는 곳인데 특별한 기간에 때맞춰 방문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날 밤이 깊어서야 일행들이 전부 우유니에 도착했다. 어찌나 심심했던지 반가워 죽을 뻔했다. 여러 가지 투어 상품 중에서 우리가 고른 건 오전에 떠나 해 지는 것까지 보고 나오는 day+sunset과, 새벽 2~3시쯤 출발해서 아침 해 뜨는 것까지 보고 사막을 빠져나오는 star+sunrise. 이튿날 아침을 먹고 여행사 앞에 모여서 지프를 타고 사막으로 향했다.
마을을 벗어나자 금방 사막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도 차창 너머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볼리비아 국민이 수천 년을 먹는대도 남는다는 소금 100억 톤. 모래 대신 사막을 채운 새하얀 소금 결정들이 하얀 모든 것보다도 더 흰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설원과는 또 다른, 녹지 않을만큼 견고하고 뜨거운 백색. 세상에서 가장 검은 색이 반타 블랙(vanta black)이라던데, 가장 흰 색이 있다면 그게 바로 여기 있겠다 싶었다.
우유니는 우기인 12~3월이면 20~30cm의 물이 고여 사막 아닌 호수가 된다. 7월은 완연한 건기였다. 물의 흔적이 없었다. 건기에도 물이 차 있는 곳이 있긴 있다고 했다. 대신 물을 찾아 더 멀리 들어가야 하고, 그만큼 물 있는 곳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짧다. 비수기는 비수기였다.
가이드인 뻬드로는 말없이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았다. 달려도 달려도 창 밖의 풍경이 같아서 최면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물 없는 우유니는 물이 없는 대로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사방이 그저 파란 하늘과 하얀 소금뿐. 그 위를 달리는 우리 지프가 이 세상의 유일한 불순물 같았다.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은 최초의 우주에 불시착한 비행선 같기도 했다. 두 눈을 씻어내는 듯한 아름다움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도 가도 끝없는 순백 위, 그 어디도 아닌 곳 한가운데 멈춰 점심을 먹었다. 새하얀 세상을 이따금씩 두리번거리며 먹는 점심 맛이 기가 막혔다. 지프는 하얀 세상을 달리다가 때때로 소금 호텔과 박물관, 선인장으로 덮인 바위섬인 '어부의 섬(Isla del Pescador)' 같은 곳에 들렀다.
내비게이션이 없고 심지어 통신도 터지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서 무엇을 기준 삼아 달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기했다. '길이라도 잃으면 어쩌지' 잠깐 걱정했다가 애초에 길 같은 건 없구나 싶어서 웃음이 피식 나왔다. 뻬드로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서툰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물 냄새로 길을 찾아."
뻬드로의 물 냄새 맡는 능력에는 다행히 문제가 없었다. 드디어 물이 차 있는 지역에 도착했다. 지프차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사진 찍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장화로 갈아 신고 지프 밖으로 뛰어나갔다.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경쾌했다.
물이 찬 우유니에서 시공간의 기준은 사라져 버렸다. 하늘과 물, 땅과 하늘,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의 구분이 무색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평생 꿨던 그 어느 꿈보다도 아름다운 꿈. 수평선이라고 해야 할지, 지평선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아스라한 경계선만이 현실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해가 시나브로 내려앉았다. 일몰이 찾아오자 하늘과 땅이 동시에 물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온통 푸른빛이었다. 노랑이 영역을 넓히나 싶더니 이내 분홍색과 하늘색이 어우러졌다. 맞은편에선 보름달이 빼꼼, 자취를 드러냈다. 숨이 턱 막힐 만큼 황홀한 광경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 나 따위가 끼어들어 있구나 싶어서 행복했고, 감사했다. 이 고운 세상을 살면서 자주 거친 생각을 하고 나쁜 마음을 먹었던 게 부끄러웠다. 오만가지 감정이 몰려드는 바람에 찔끔 눈물이 났다.
벅찬 마음을 다스리며 엄청난 속도로 사진을 찍었다. 초 단위로 하늘이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사진 찍는 손도 분주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인 뻬드로가 찍어주는 사진들은 그야말로 빛과 그림자, 물과 하늘이 어우러진 한 편의 예술이요, 정교한 과학이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엄청난 역작들이 탄생했다.
못내 떠나기가 아쉬워 한참을 배회하다 뻬드로 재촉에 못이겨 지프에 올랐다. 다음 투어를 위해서라도 해가 떨어진 사막을 빠져나와야 했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우유니 최고의 피자 맛집에 가서 포식을 했다.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나른함.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쪽잠을 잤다. starlight+sunrise 투어를 위해 3시 정도까지 여행사 앞에 모여야 했다. 이른 새벽, 낮 동안의 순백이 사라진 우유니 사막을 칠흑 같은 어둠이 채우고 있었다. 새카만 그 속을 한참 달렸다.
건기에 대한 걱정은 사라졌지만 두 번째 위기가 현실이 되었다. 월력을 확인하지 못하고 일정을 짰기 때문에 불거진 일이다. 우리가 머무는 기간은 보름달이 완전히 차오르는 때였다. 보름달이 뜨면 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막 한가운데서 빛나는 달은 별보다도 훨씬 밝으니까.
정말 별은 눈에 잘 띄지를 않았다. 게다가 우리 조에는 DSLR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혹시 몰라 가져왔으나 거의 꺼내보지 않은 하이엔드 카메라가 내게 있긴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기계도, 내 사진 실력도. 결국 뭇사람의 사진 속에서 보는 것 같은 우유니의 별 사진은 찍을 수 없었다. 아쉬움이 남아야 또 한 번 올 수 있다고들 하니까, 일출을 기다리는 동안 살을 찢는 추위를 견디며 마음을 다독일 수밖에.
일출은 일몰만큼 찬란했다. 온통 새까만 세상에 어느 순간 빛이 스며들었다. 빛이 한 덩어리의 어둠을 둘로 가르자, 하늘과 땅, 물과 하늘, 위와 아래의 오묘한 경계가 생겨났다. 고요 속에서 만물의 시작을 선언하는 듯한 아름다움. 그건 영락없이 태초의 것이었다. 천지창조의 첫 장면을 보는 듯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2~5
나도 모르게 창세기를 읊조리며 떠오르는 해를 만끽했다. 꽁꽁 얼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돼버린 발과 콧잔등이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비현실성을 더해주었다. 새벽 내 덜덜 떨다가 나 마침내 얼어 죽어서 천국에 왔나 싶었기 때문이다.
우유니 사막을 누비며 보낸 이틀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숙소로 돌아와 잔뜩 얼어붙은 몸을 녹이니까 주체할 수 없는 피로가 몰려들었다. 일행 대부분이 밤이 될 때까지 잠만 잤는데, K오빠만 홀로 다시 sunset+starlight 투어에 나섰다. 추워 죽을 것 같아서 모두가 지프차 안에 웅크리고 있을 때도 별을 보겠다고 의자를 들고 나가 사색하던 그였다. 다들 혀를 내둘렀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기절을 할지언정 그때 K오빠를 따라 한번 더 투어에 나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다른 감동을 선사하는 우유니였기에, 몇 번을 다시 본대도 매 순간이 새로웠을 테니까.
죽기 전에 다시 한번, 사랑하는 사람들과 우유니에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 내내 깨끗하고 아름답기를.
#소소한 여행 팁
1. 우유니 오픈 채팅방에서 '차가운 순대'님이 제공해주신 꿀 같은 정보를 첨부했다. 문제 시 삭제하겠습니다.
2. 우유니의 모든 투어는 최대 7명이 한 조로 진행된다. 지프차 수용 인원 때문. 둘이서도 갈 수는 있다. 인당 부담금이 커지는 것 뿐이다. 현지에 도착하면 여행사 벽에 종이가 붙어 있는데 빈자리에 이름을 써넣으면 된다.
3. 일정이 어그러지는 걸 막기 위해 대개는 오픈 채팅방에서 미리 일정 맞는 사람들끼리 조를 짠다. 나도 미리 조를 짠 덕분에 남미 여행 틈틈이 함께해준 귀한 동행들을 만났다.
4. 아타카마 사막으로 넘어가는 2박 3일짜리 투어도 있지만 지나치게 고되다고 한다. 우유니 시내에 머무르면서도 짤막한 투어를 여러 개 조합해 우유니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 sunrise+day, sunset+star 조합을 추천한다. star+sunrise는 너무 달이 휘영청 뜬 시간부터 시작돼서 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
5. 여행사는 오아시스와 브리사가 유명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사진을 찍어주는 포토그래퍼(사실은 가이드)들이 소속된 곳이다. 브리사의 조니와 호세가 유명하다. 뻬드로도 괜찮다. 우리는 운 좋게 뻬드로&조니와 함께할 수 있었다.
6. star+sunrise 나갈 때 발 건강에 유의하자. 수면 양말에 핫팩을 붙이고 알파카 양말을 신고 비닐봉지를 신은 뒤 또 알파카 양말을 신었는데도 발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춥다.
7. 숙소가 대체로 아주 아주 아주 춥다. 난방이 잘 된다는 호텔(Salcay)을 찾아갔는데도 전기방석이 없었으면 숨질 뻔했다. 라디에이터가 놓여 있는 방도 있고 없는 방도 많은데, 대개 휴대용 라디에이터를 가지고 있으니 요청하면 줄 것이다.
8. 호텔 살카이는 온수가 잘 나오고 방도 따뜻한 편이었다. 조식도 꽤 먹을만했다. 빵, 요거트, 주스, 시리얼, 각종 과일. 카운터에 빨래를 맡기면 외주로 어디서 해가지고 오는데 가격이 조금 비싼 편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빨래가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9. Kactus에서는 한식을 파는데 김치볶음밥은 먹지 말자. 한식이 아닌 오묘한 짠맛이 난다. 다들 비추하는 이유가 있었는데... 하지 말라는 걸 꼭 해보고 깊은 후회.
10. Santa Cruz(산타크루즈) 은행, 수수료 없이 하나 비바 체크카드로 달러를 인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잔뜩 뽑자. 칠레부터는 달러 인출되는 ATM이 없었던 것 같다. 현지 화폐를 출금하려고 해도 회당 인출 한도가 작고 수수료도 비싸서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돈을 여기서 많이 뽑아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