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민크루 May 07. 2020

갑질 사례

크루즈 승무원의 격리생활 <35일 차>


35일 차 - 4월 19일



우리 배를 포함한 크루즈 4척이

필리핀이 받아주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며

아직도 마닐라 베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필리핀은 과연 얼마에 우리를 받아줄까.


선사는 마닐라에서 닻을 내리기 위해

얼마를 지불할까.


Essential Manning (영업 재개 전까지 배 운행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으로서

현재 필요한 인원을 제외한

635명 중 531명의 필리피노 크루를

집에 보내기 위해


선사는 필리핀의 갑질을

과연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러다가 협상이 잘 안되면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


이런저런 걱정에 개운치 않던 아침이었다.





오전 9시경이었다.


캡틴이 컨트랙이 끝난 크루들을 불러 모았다.


도대체 왜 부르는 걸까

집에 보내려는 걸까

비행기 없을 텐데

필리핀에서 내리기 싫은데

필리핀에서 격리당하기 싫은데


오만가지 걱정과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미팅 장소에 가보니

캡틴과 몇 매니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용인즉슨,


필리핀이 하선 예정인 531명 필리피노에 한해

14일 선내 격리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사 측은 이미 35일 동안 자체 격리를 해왔고

크루 전원의 건강에 이상이 없으니

되도록이면 선내 격리를 피하고 싶은 입장이었다.


그래서 어제부터

선내 격리를 아예 안 하거나,

할 수밖에 없다면 되도록 기간을 줄여보려고

협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리핀이 $$$에 눈이 멀어

이치에 맞지 않는 요구를 하고 있음을

천 번 만 번 아는 바이지만


협상이 잘 안 이뤄진다 하더라도

선사로서는 필리피노 크루 하선을 위해

무리한 요구일지라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만일의 선내 격리 조치에 대비해서

자원봉사를 해줄 수 있는 크루가 있는지

캡틴이 부탁을 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531명 필리피노 크루에 의해 불어날 일거리는

어림잡아 생각해봐도

컨트랙 중인 크루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 1 )

531명의 객실을 같은 구역으로 변경해야 한다.

그것도 되도록이면 발코니 객실로 해야 한다.


( 2 )

이미 모든 크루가 객실을 이용 중이니

전원이 대이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 3 )

이동이 끝나면 객실 청소도 해야 하고

침대 시트 및 이불, 샤워 커튼, 수건 등등

바꿔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 4 )

격리가 시작되면 삼시세끼 룸서비스.

음식을 배달해야 한다.


( 5 )

식사가 끝나면

남은 음식도 그릇도 회수해야 한다.


( 6 )

물, 음료수, 커피, 차, 설탕, 우유, 담배, 재떨이 등등

갖가지 배달도 해야 한다.


( 7 )

객실에서 못 나오나 청결을 유지해야 하니

청소는 필리피노 크루가 각자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청소기와 각종 세제도 배달해야 한다.


( 8 )

쓰레기 회수도 있다.


( 9 )

빨래도 대신해줘야 한다.

끝나면 다시 가져다줘야 한다.


( 10 )

전화로 각종 질문 및 요구 사항이 있을 것이다.



대충만 생각해도 끔찍하다.

그것도 죄다 하기 싫은 일들이다.


제발 그럴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나라라면 분명히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베케이션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샐러리는 없더라도


어차피 선내에 있고

어차피 벌어질 일인데


나는 기꺼이 무엇이든 돕겠다고 이름을 적어내고

내 발코니 객실로 돌아왔다.



바다는 우리들의 걱정은 알 턱이 없다.


조용하고 고요하고 평온하다.



한참을 바다를 쳐다보고 있는데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방에 있는 모리션 리셉셔니스트 제프

친한 게이 친구다 ㅎㅎ


제프는 나보다 2주 정도 먼저 컨트랙이 끝난 상태로

마찬가지로 이름을 적어내고 왔다고 했다.


얼마나 많은 크루들이 도우려 할까.

걱정이다.


막상 할 생각 하니 솔직히 싫기도 하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셔도

아무런 업데이트가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서

방에 돌아와서 기타 연습을 했다.


컨트랙이 끝나고 나서

캐내디언 기타리스트 브라이언에게

몇 번 기타 레슨을 받았다.


기타는 만져본 적도 없기에

아직은 기초만 배우는 중이다.



오후 3시 45분경이었다.


늦어도 오후 5시까지는

모두 크루 캐빈으로 돌아가라는

캡틴의 명령이었다.


필리피노 크루의 14일 선내 격리가 확정되었고

객실을 재배치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객실을 비워야 한다는 것이다.


오후 5시 이후부터는 객실 청소가 이뤄졌다.


또 크루 전원 대이동과 대청소다.

한 달 중 벌써 4번이나 하는 이사지만

14일 동안 일어날 별의 별일을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하선 예정인 531명의 필리피노 크루는

밤 12시 전까지 배치된 객실로 이동하고

이후에는 객실 밖으로 나올 수 없다.


4월 20일부터

14일 격리 카운트가 시작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크루즈에도 사재기가 존재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