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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크루 Jun 02. 2020

34살 크루즈 승무원의 생일

뱃가족이 있어 외롭지 않은 생일



5월의 마지막 날, 31일이 내 생일이다.



환상적인 날짜다.

싱그럽고 화사한 프리지어와 라일락이 지는 봄의 끝자락이면서도, 우아하고 화려한 수국과 장미가 피는 여름의 시작이다.



언제나 완벽한 날씨다.

덥지도 않은 게 햇살 좋고 선선한 날씨가 긴팔을 입어도 반팔을 입어도 괜찮은 나들이하기 딱 좋은 날씨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가 살아온 그 어느 육지나 바다 위에서도 비가 오거나 궂은 날씨였던 기억이 없다.



게다가 더 행복하려고 한 살 또 먹는다.

4살의 엄마와 아빠가 세상 전부이던 아기도 아니다. 14살의 그림을 그만두고 음악을 시작하려던 고민 많던 중학생도 아니다. 24살의 정신력으로 일본에서 논문 쓰고 장학금 챙기고 아르바이트하며 버티던 유학생도 아니다.

이제는 아름답게도 34살 먹은, 내 편 만나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싶으면서, 더 많은 경험에 대한 갈망을 내려놓지 못해서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크루즈 승무원이다.




10년 해외생활, 그리고 4년 뱃생활.

그동안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 수없이 배우고 깨지고 울고 화내고 참고 웃었던, 자랑스럽고 행복한 내 인생이다.

하지만 14년을 집 밖에 있다 보면 내 생일은 물론 가족과 친구들의 생일, 기념일, 입학식, 졸업식, 결혼식 등 각종 행사에 함께하지 못하는 건 항상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이제는 내 생일에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는 게 친한 친구 얼굴 한번 못 보는 게 속상하지도 않다. 한 번밖에 없는 엄마 환갑에 같이 있어주지 못했어도, 한 번밖에 없는 남동생 졸업식에 못 갔어도, 아빠 기일에 가족과 함께하지 못했어도, 속상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 하나도 속상하지 않은 게 아니라, 뱃생활 그만두고 한국땅으로 돌아가기에는 아직 시기상조 같으니까, 내 현실에 안 맞게 굳이 그까짓 감정을 키우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제 미역국 잘 끓인다고 만나면 반드시 끓여주겠다는, 코로나 때문에 두 달 넘게 자택 근무 중인 동생이 차려주는 아침.

작은 집으로 이사해서 밝고 씩씩하게 싱글 라이프 중인 엄마랑 먹는 맛있는 한우 점심.

잘 먹고 다니는지 항상 걱정되는 큰오빠들이랑 만나기만 하면 먹는 족발이랑 회 저녁.

묵은 얘기 두서없이 해도 다 들어주는 보고 싶은 친구랑 신나게 뜯어먹는 치맥 야식.


이중 단 하나도 할 수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백수 아닌 백수 되게 생겨서 뭔가 자꾸만 불안하다. 오갈 데 없는 배 안에서 매일 보고 일하고 먹고 마시고 하는 그저 또 다른 하루일 뿐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내 생일이라고 특별한 날로 만들어주는 뱃가족이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한 34번째 생일이었다.



엄마의 손글씨 “건강하게 낳아줘서 고마워, 엄마.”


큰(사촌)오빠들 “친오빠였으면 더 좋았을텐데!”


클라리넷 시작한 후 그렸었던 과제 “하하하.... 어렸을 때 쓴거니까;;”


취업 활동을 시작해야했던 3학년 여름 “풋풋하구나.”


떨어져있지만 전할 수 있는 내 마음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이야.”


가고 싶었던 동생 졸업식 “졸업도 취직도 고맙고 수고했다.”


마지막일줄 몰랐던 엄마 아빠의 동경 방문


크루 바 반이상은 전세내고 시끌벅적했던 생일 파티 in 크루즈.


해변가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바캉스 기분 내며 생일 파티 in 기항지


방을 통째로 빌려서 요란하게 서프라이즈 생일 파티 in 크루즈


34번째 생일이자 4번째 생일 파티 in 크루즈


제일 좋아하는 대빵 보스 로넬과 닐, 그리고 4총사


최고 착한 이탈리안 드러머 지아니랑 귀여운 브리티시 샵 매니저 마크


최고 일꾼 인디안 바 슈퍼바이저 브랜든, 그리고 베스트 프렌드


베프랑 대빵이 준비해준 생일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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