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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효자 흉내를 내기 위한 우리들의 이야기

나는 오늘도 효자 흉내를 내기 위해

by 수미소

새벽의 흙냄새, 어머니의 잠결, 그리고 아들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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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

눈을 뜨자마자 공기의 냄새가 달랐다.

비가 막 그친 뒤의 땅 냄새,

밤새 숨을 죽이고 있던 흙이 이제야 안도하듯 내쉬는 그 축축한 숨결이었다.

그 냄새는 언제나 나를 일으켜 세운다.


방 안은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가족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탁자 위의 열쇠를 손에 쥐었다.

오늘도 어머니 몰래, 아무 말 없이 산기슭의 텃밭으로 향하는 길이다.


어머니는 내가 오는 걸 아시면 언제나 단호하게 막으신다.

“니도 일주일 내내 일하잖아. 내 상추, 배추, 고추 농사일은 내가 한다.”

그 말은 고맙고도 아프다.

내가 어머니를 걱정하는 만큼,

어머니도 나를 염려하신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나는 더 이른 새벽에 움직인다.

어머니가 주중에 밭에 오셔도 더이상 손댈 일이 없도록,

그 숨겨둔 일들을 미리 찾아 해치운다.

비에 쓰러진 고추 지지대를 다시 세우고,

물에 잠긴 배추 고랑을 파내며,

흙 위에 남은 그분의 수고를 대신 덮어준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숨은 효도’다.


차창 밖으로 짙은 안개가 흘렀다.

젖은 도로 위로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졌다.

나는 라디오를 끄고, 조용히 엔진 소리만 들었다.

그 낮은 진동이 이상하게도 어머니의 맥박처럼 느껴졌다.


비가 내린 뒤의 흙은 늘 말없이 사람의 마음을 적신다.

‘오늘은 텃밭 흙이 많이 무르겠지.’

그 생각이 들자,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특히 비가 많이 내린 다음날은 어머니가 가장 먼저 밭에 나가신다.

물에 잠긴 고랑을 손으로 다시 파내시고,

넘어진 작물들을 일으켜 세우신다.

나는 그 일을 막으러 가는 중이었다.

오늘의 첫 임무는 단 하나 —

‘어머니보다 먼저 흙을 만지는 것’.

그것뿐이었다.



마을 어귀에 닿았을 때,

동쪽 하늘은 막 새벽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서 고무장화를 꺼냈다.

풀잎마다 맺힌 이슬이, 새벽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그 위에, 내가 오기 전에 새겨진 작은 발자국이 있었다.

어머니의 발자국이었다.

“역시… 벌써 나오셨구나.”

가슴 한켠이 서늘해졌다.


밭두렁을 따라 몇 걸음 옮기니,

어머니는 이미 허리를 굽히고 호미질을 하고 계셨다.

그 뒷모습은 늘 그렇듯 단단하고,

흙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어머니의 눈에 띄지 않게 살짝 방향을 틀었다.

오늘은 굳이 마주치지 않기로 했다.

괜한 말다툼 대신,

그저 내가 대신할 수 있는 일만 조용히 해치우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삽을 들고 밭의 아래쪽 고랑으로 내려갔다.

젖은 흙이 무겁게 달라붙었다.

무너진 고랑을 바로 세우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등에는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이 정도면, 오늘 엄마는 조금 덜 힘드시겠지.’


개구리 울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바람은 풀잎을 스쳤고, 햇살은 천천히 밭 위로 번져갔다.

나는 그 순간 혼자 미소 지었다.

이 새벽을 어머니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흙을 만지는 내 손끝에서 어머니의 손이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거칠고도 따뜻한 손.

그 손이 나를 여기까지 자라게 했음을,

나는 흙냄새 속에서 다시 깨달았다.


해가 들기 전, 나는 삽을 내려놓았다.

고랑은 반듯했고, 물길은 고르게 잡혔다.

어머니의 손이 닿지 않아도 되는 하루를

그렇게 미리 만들어두는 것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산 아래 마을은 아직 고요했다.

새소리가 멀리서만 들릴 뿐, 세상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집에 도착하면 대문 앞이 어둡다.

아직 불이 꺼져 있고, 창문 사이로 어머니의 방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불 아래 고요한 숨결이 느껴질 때, 나는 그제야 안심한다.

오늘도 어머니는 푹 주무시고 계시다는 걸.


그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조용히 현관문을 닫는다.

그리고 다시, 아무 일 없던 듯 내 집으로 향한다.


주말마다 반복되는 이 새벽의 풍경.

어머니가 깨시기 전에 일을 끝내고,

나는 들키지 않게 돌아오는 길.

이것이 우리 모자의 숨바꼭질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일감을 숨기고,

나는 그 일을 찾아내어 먼저 해버린다.

그 놀이 속에는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은 언제나 말보다 조용하다.

서로의 수고를 감추려는 마음,

그 속에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함께 산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요즘 세상에 그런 아들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나는 안다.

이건 특별한 일이 아니라,

그저 오래된 마음의 습관일 뿐이라는 걸.


집 근처를 지나며 차창 너머로 지붕 끝을 바라봤다.

마당가 장독대는 여전히 반짝였다.

햇빛에 반사된 유약빛이 어머니의 미소처럼 따뜻했다.

“엄마, 오늘은 상추밭, 배추밭, 고추밭 모두 물길 잡아놨어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그 말을 마음속으로만 하고,

나는 천천히 핸들을 돌렸다.

햇살은 점점 짙어지고, 밭두렁 위에는 아침 안개가 다시 피어올랐다.


돌아오는 길, 내 손에 묻은 흙냄새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건 어머니의 삶을 잠시 대신 만진 흔적이었다.


라디오를 켰다.

잔잔한 트로트 한 구절이 흘러나왔다.

‘어머니, 그 이름 하나로 나는 삽을 듭니다…’

그 가사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도시에 도착하자 하늘은 이미 저녁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불이 켜진 아파트 창문들 사이로

누군가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차를 세우고, 손을 바라봤다.

손톱 사이에 낀 흙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건 어머니의 세월을 잠시 대신 감당한, 작은 흔적이었다.


나는 오늘도 효자 흉내를 냈다.

하지만 그 흉내가 조금은 진심이 되길 바라며,

다음 주에도, 그다음 주에도

또 차를 몰고 새벽길을 달릴 것이다.


어머니는 모르실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 조용한 효도의 시간 속에

가장 큰 사랑이 숨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랑은,

흙냄새처럼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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