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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이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으면 좋겠다

효자 흉내내는 아들의 작은고백

by 수미소

삶은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닮아가는 것이다


다시 또, 주말이 다가온다.
1부에서 이어진 시간들이 어머니와 함께한 지난날의 기록이라면, 이제 2부는 그 위에 새겨지는 또 다른 이야기다.
팔순을 넘긴 어머니와 보내는 주말은 여전히 익숙하면서도, 매번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그 반복 속에서 나는 어머니의 삶을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되고, 나 또한 닮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오늘은 토요일의 전날이다.
토요일마다 새벽에 달려가는 길,
“이번엔 뭘 가져가야 하나” 하며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언제부턴가 아내가 미리 준비해 둔 반찬 봉지 하나가 들어 있다.
어머니가 잘 드실 것 같은 걸로 챙겨주는 것이다.


한때는 아내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어머니한테만 드리지 말고, 당신도 좀 챙겨 먹어.”
“맛있는 당신도 이제는 몸 좀 챙겨야지.”

말끝은 잔소리 같았지만, 속마음은 늘 내 건강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가끔은 장난스럽게 한숨을 쉬며 덧붙이기도 했다.
“허우대는 멀쩡한데 속은 영 비실비실하다니까. 주말마다 어머니만 챙기지 말고, 나도 데리고 가서 코에 바람이라도 쐬줘야 되는 거 아냐?”

잔소리인지 농담인지 모를 그 말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결혼하고 함께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고작해야 어머니 모시고 서울 시누이 집에 다녀온 게 전부였다. 그러나 나는

매주 내려가는 시골길이 나에게는 여행길이 되어 버렸고 일주일의 보상처럼 익숙해져 버렸다.

아내에게 그 시간은 공허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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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5시 30분이면 시골로 향한다.

집에 도착하면 새벽 6시.

굽은 허리로 벌써 텃밭 풀을 매고 계신 어머니,

된장찌개를 끓이려고 부엌에 서 계신다.


한때는 장손 며느리라 음식 잘한다는 소리 듣던 분이,

이제는 싱크대 위에서 양파 하나 썰기도 힘들어하신다.

굽은 허리에 싱크대가 너무 높아져 버렸다.


내가 대신 끓이겠다 해도 막무가내이시다.

“이게 달랑 재료만 넣고 끓인다고 맛있는 게 아닌기라.

다신물도 내고 정성이 들어가야 맛이 나는 거라.”

그래서 나는 식탁에 앉아,

‘요거 넣어라, 고거 넣어라’ 지휘하시는 어머니 말씀만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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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어머니께 음식 맛 비결이 뭐냐고 물으면,

“제일 큰 비결은 마지막에 미원 톡톡 넣는 기다.”

하시곤 한다.


그러면서도 하소연을 놓치지 않으신다.

“너희 외숙모는 밥이 그렇게도 맛있단다.

경로당 와가 상추에 밥을 우째 그리도 맛있게 싸묵는지…

나도 시원하게 쌈 한 번 싸서 묵어보는 게 소원이다.

도대체 뭐가 씹혀야 묵지.”


나는 안다.

아무리 입맛이 없어도,

내가 해간 음식이 입에 맞으면 밥 한 공기 뚝딱 비우신다.

입에 안 맞으면?

그건 곧장 옆집 막내 동생 냉장고로 직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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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뭐라도 드시게 챙겨 가면,

“그래가 맛이 나겠나? 정성이 들어가야지.”

하신다.

팔순 어머니 앞에서는 환갑 지난 자식도 아직은 어린애다.


그럴 때 문득 깨닫는다.
사랑은 세월이 흘러도 같은 모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받았던 말이 다시 내 입에서 흘러나오고,
어머니의 주름진 손길이 내 손끝에 겹쳐진다.
그 순간만큼은 어머니의 삶이
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느낀다.


나 또한 내 30대 자식에게 "이것 챙겨 먹어라, 차 조심해라" 하듯이.

결국 나는 어머니의 삶을 조금씩 닮아가고 있는 셈이다.


아침에 이것저것 만들어 가져가면,
맛을 보시곤 “이거 맛있게 끓였네.” 하신다.

가끔은 반찬가게에서 사 온 것도
“이거 참 맛있네, 잘 만들었다.
어케 만들었노?” 하시며
칭찬처럼 묻곤 하신다.

나는 속으로 웃는다.
사 온 반찬인데도 어머니는
내 솜씨라고 철석같이 믿고 계신다.
그 웃음 속엔 장난기와 인정이 함께 섞여 있었다.

그 웃음에는 많은 이유가 있음을 나도 알고,

어머니도 아신다.

다만 서로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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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효자인 척 흉내만 내고 돌아왔지만,
그 흉내조차 어머니에겐 큰 위로가 되고
나에겐 살아 있는 삶의 기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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