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흉내내는 아들의 작은고백
삶은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닮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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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또다른 토요일.
무더운 날씨만큼이나
어머니의 마음도, 말도 유난히 날카롭다.
요즘 따라 어머니의 눈가가 자주 젖어 있었다.
말은 아끼시지만, 무겁게 내려앉은 한숨이
부엌 가득 차올랐다.
평소 같으면 된장찌개 간을 보며
흥얼거리실 텐데,
그날은 숟가락을 오래 들고 계셨다.
예전 같으면 “니 밥은 먹었나”가
첫마디였는데, 요즘은 그 말이 나오기까지
한참이 걸린다.
“괜찮다, 괜찮다” 하시지만
그 괜찮다 속에는 괜찮지 않은 것이 숨어 있었다.
누구 이야기인지는 말하지 않으셔도 알 수 있었다.
걱정은 이름을 감추고도
어머니 얼굴에 다 드러났다.
그저 “사람 일은 모른다”며 짧게 흘리셨지만,
그 말이야말로 가장 깊은 근심의 고백이었다.
“요즘 들어 유난히 심해지는 걱정스러움, 짜증스러움.
그 이유는 분명히 있었고,
내가 그 갑작스러운 근심을 대신할 수는 없다.”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싶고,
닿지 않는 메아리에 얼마나 더 소리를 지르고 싶을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끝없이 이어지는 메아리 속에는
근심과 두려움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 말들은 자식들에게 오래된 못처럼
가슴에 박히지만,
어머니는 그것이 자식들에게는 상처가 될것 이라는걸 걸 모르신다.
“어머니는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하시지만, 그 말끝에는 늘 떨림과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그저 자식을 위한다는 마음 하나로
여전히 같은 말을 이어가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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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무의식적으로 나와 얼마나 닮았는지를 먼저 재본다.
좋아하는 음악, 영화, 음식,
심지어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까지.
교집합이 많을수록 마음은 놓이고,
“이 사람, 나와 잘 맞는다”는 안도감에
대화는 쉽게 이어진다.
그러나 다른 의견이나 방식을 마주하는 순간,
왠지 모르게 불편해지고,
심지어 괜히 거부감까지 일어난다.
그 마음의 밑바탕에는
오래도록 우리 안에 뿌리내린 고정관념이 있다.
‘닮은 것은 옳고, 다른 것은 틀리다.’
그 생각이 우리를 가두고,
때로는 소중한 관계마저 멀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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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시대는 지금과 달랐다.
가난 속에서 자식들을 키워야 했고,
희생과 책임은 부모의 의무였다.
“다 지 잘되라고 하는 소리지.
천지도 모르고, 언젠간 알게 될끼다.”
짧은 그 한마디 속에는
살아남기 위해 버텨온 세월의 절박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방식은
세월이 흐르며 자식들의 가슴에
멍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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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득 거울 앞에서
낯선 내 모습을 발견한다.
내 입에서도 어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토록 싫었던 이야기들을이
“니 잘되라고 하는 소리다.”
그토록 서운했던 말들을
나도 모르게 내 자식에게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부모를 원망하던 내 모습과
내가 겹쳐져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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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사랑은 모순적이다.
상처를 남기지만, 동시에
그 속에는 자식을 살리려는
간절한 마음이 숨어 있다.
우리는 부모를 원망하면서도,
다시 부모가 되면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그 아이러니 앞에서 나는 멈춰 서서
스스로를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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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님을
조금 늦게 깨닫는다.
“그 깨달음 하나로, 나는 어머니의 언어를 원망만 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시간을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닮은 것’을 옳다 하고,
다른 것을 틀리다 여겼다.
그래서 부모님의 언어가 답답했고,
그 말들이 상처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그 말들은 시대가 새긴 주름이며,
살아내기 위해 붙잡은
유일한 언어였음을.
그래서 나는,
그 시절을 버텨낸 어머니가
안쓰럽고, 불쌍하다.
그 배경을 떠올릴수록
이해 못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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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만이
상처를 줄이고, 닮아가되
더 좋은 쪽으로 발전하는 길일 것이다.
부모님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려는 순간,
우리는 원망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그 자유로움이야말로, 나를 다시 어머니 곁으로 돌아오게 하는 힘이었다.”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전할 힘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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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효자인 척 흉내만 내고 돌아왔지만,
그 흉내조차 어머니와 나를 이어 주는
또 다른 삶의 기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