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흉내내는 아들의 작은고백
삶은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닮아가는 것.
짜파게티와 햄버거, 늦깎이 첫맛
오늘은 또 다른 토요일이다.
새벽 5시,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창밖을 본다.
5시 30분,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면
나도 부지런히 몸을 일으킨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무언가를 챙긴다.
이제는 습관처럼 주말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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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어머니 댁 대문은 언제나 열려 있고,
허리를 굽히신 채 텃밭을 매고 계신다.
삶은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시작된다.
어둑한 새벽부터 주말마다 내려오는
자식의 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주말이면 유난히도 일찍 텃밭에서 하루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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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주중에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나는 그 노동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
주말마다 서둘러 내려오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시골의 일들 속에
둘만의 그 경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쯤 해두면 한 주는 쉴 만하겠지” 싶다가도
어머니는 또 보물찾기 하듯 일을 찾아내신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주말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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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내가 퇴근길에 햄버거를 사주며 말했다.
“이거 어머님께 드리고 와요. 드셔보셨을까?”
식탁에 올려놓자 어머니는 처음 맛보는 듯
“내, 태어나서 처음 묵어본다 아이가.
이게 햄버거라고?” 하시며 드신다.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금세 마음이 아려왔다.
여태 못 드셔본 음식이 얼마나 많을까.
여태 못 가본 곳이 얼마나 많을까.
우리에게는 평범한 것들이
어머니에게는 팔순을 넘어서야 비로소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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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엔 짜파게티 얘기도 나왔다.
혼자 계실 때 라면처럼 끓여 드셨다며 말씀하셨다.
“라면처럼 물 왕창 부어 끓였지.
끓이고 나니 국물이 검어지더라.
숟가락으로 퍼묵는데… 이 라면이 시고 맛없더라.”
나는 그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터뜨렸다.
군대 시절, 짜파게티를 라면처럼 끓여
선임에게 혼났던 기억이 겹쳤기 때문이다.
그 시절 비벼 먹는 라면이 군복무 기간에
판매되어 처음 접했었다.
세월이 다르고 상황이 달라도,
삶의 작은 해프닝은 서로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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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경로당에서 어머니는 자랑을 하셨다.
“내, 햄버거라는 거 처음 묵어봤다 아이가.
고기도 들고, 맛도 괜찮더라.”
그러자 다른 할머니들이 귀를 쫑긋 세우셨다.
“큰 거 먹어봤네, 나도 못 먹어봤다.”
의외로 그런 분들이 많았다.
순간 경로당 안은
“죽기 전에 자식들에게 자주 사달라 해라”
서로의 위로와 웃음으로 가득했다.
치킨 자랑에 이어 햄버거 자랑까지.
어머니의 늦깎이 첫맛은
함께 나누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부모는 미안했던 것만 사무치고,
자식은 서운했던 것만 사무친다.
그 어긋남 속에서 웃음과 눈물이 함께 스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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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파게티는 "마라탕"이 아니라 ‘짜파탕’이 되고,
햄버거는 경로당의 ‘첫맛 자랑’이 되는 집.
비록 맛은 엉망이어도,
그 순간만큼은 어머니의 얼굴에
늦깎이 웃음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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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알았다.
그 웃음 속에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작은 설렘이 숨어 있다는 것을.
어머니의 늦은 첫 경험들은
삶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작은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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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효자인 척 흉내만 내고 돌아왔지만,
그 흉내조차 어머니의 늦깎이 웃음을
기록해 두는 소중한 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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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미안했던 것만 사무치고,
자식은 서운했던 것만 사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