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정일기 2023 12 19
타인의 괴로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타인의 괴로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매우 어설픈 착각이다. 아무리 같은 조건에서 일어난 괴로움이라도 그 괴로움은 서로 다르다. 단지 괴로움이란 이름만 같을 뿐이다. 그리고 힘들다는 건, 그것만 같을 뿐이다. 아무리 같은 조건에서 일어난 괴로움이라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 괴로움으로 아파하는 아픔의 주체가 서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 괴로움은 같을 수 없다.
아무리 비슷해 보여도 이 세상 모든 괴로움은 이 세상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다. 아니 그 이상이다. 괴로움은 서로를 구분시킨다. 나의 괴로움은 온전히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개체화의 원리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온전한 나의 내면을 만든다. 내면은 감각으로 알 수 없다. 내면은 비록 그것이 나의 내면이지만 나에게도 온전히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나의 내면은 나도 모른다. 그렇게 나의 괴로움을 나도 온전히 모르기도 한다. 종종 나도 모르는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흐르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도 온전히 모르는 나의 괴로움을 남이 어찌 알겠는가. 모른다. 나의 괴로움을 모른다고 실망하거나 미워하지 말자. 나도 나 아닌 누군가의 괴로움을 알지 못한다. 우린 서로 각자의 괴로움을 온전히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러면 공감은 무엇인가? 나도 나의 괴로움을 모르고 남의 괴로움도 모른다면, 공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가능하기는 한가? 그런데 공감은 굳이 다 이해하고 다 납득하고 나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잘 알지 못해도 우린 공감한다. 장례식장, 평생처럼 그곳을 찾아도 나는 그 아픔에 공감한다. 나는 부모를 보낸다는 걸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아주 막연한 이해뿐이지만, 공감한다. 심지어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그 눈물은 거짓이 아니다. 정말 더불어 아프기 때문이다. 우린 그런 존재다. 꼭 온전히 다 알아야만 공감하는 건 아니다. 우린 그런 존재다. 흔히 이야기하는 거울 뉴런이니 이런 어려운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발에 상처 난 아이를 본다. 왜 상처가 났는지 얼마나 상처가 깊은지 잘 모른다. 경우에 따라선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린 그 아이의 아픔에 공감한다.
괴로움, 나도 모르는 나의 괴로움, 그 괴로움을 어찌 나 아닌 다른 이가 알겠는가. 나도 그도 당연히 모른다. 모르지만, 더불어 있는 마음, 그 마음이 공감이다. 그리고 그 공감으로 우린 우리가 된다. 서로 잘 모르지만, 우린 우리가 된다.
유대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