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유대칠 2021 03 07
자기 배려의 시간이 없었다. 그냥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정해진 시간을 주고 정해진 일을 시키거나 누군가에게 정해진 시간을 받고 정해진 일을 하거나 이 두 가지를 하며 살았다. 대화란 것도 이런 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명령을 하거나 명령을 듣거나 정보를 주거나 정보를 받거나 이런 식이었다. 그냥 농담은 없었다. 할 줄도 모르고 즐길 줄도 몰랐다. 겨우 하는 이야기는 남의 험담이었다. 누구는 이런 옷을 입은 이상한 사람이고 누구는 이런 말투의 이상한 사람이고 또 누구는 이런저런 직업의 이상한 사람이고... 이런 식의 대화였다. 무엇인가를 좋게 말하기보다는 빨리 흠을 잡아내는 것에 익숙했다. 흠을 통해 누군가의 기쁨을 적절하게 지적질하는 것이 좋기도 했다. 그렇게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일 그리고 정해진 대화 속에서 나는 정해진 무엇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정해진 무엇으로 나를 부르면 싫었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막상 불안했다. 명령하는 누군가의 시선이 다시 게으름을 지적하며 떠오르는 것 같아 힘든 것이다.
자기 배려는 남의 시선에서 자신을 보는 것으로부터 해방됨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부모의 시선이나 친구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지 평생 그렇게 살지 못한 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미 자신의 시선 자체가 타자의 시선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음식을 하나 먹어도 남의 시선이 지배한다. 남이 인터넷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을 먹을지 결정한다. 인터넷에 글을 쓴 이가 인기가 있으면 더 좋다. 바로 옆 사람의 추천보다는 바라 옆 사람의 기호보다는 왠지 하늘에서 내려지는 계시와 같은 인터넷 속 정보들에 의존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다양한 지배자들 가운데 하나의 지배자를 고르는 사람처럼 살아가며 그 가운데 자유를 느끼지만 막상 자신은 항상 만족하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은 자신으로 자신의 혀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책을 하나 읽어도 옷을 하나 입을 때도 나는 나로 있지 못하다. 그렇게 지배를 당하며 있다. 나는 없다. 겨우 나를 느낄 때는 누군가에게 명령하고 명령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화를 내는 자신이다. 화를 내고 있지만 사실 그곳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느낀다. 화를 내며 자신은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그 타자의 시선이 제대로 되어 본 것 같으니 말이다. 대화는 없다. 그냥 명령하고 강요하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예상하며 분노하길 준비하고 실망하길 준비하고 그 가운데 타자의 시선으로 되는 자신을 보며 자존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자존감은 다양한 우울감으로 가득한 서글픈 존재일 뿐이다.
지금 살던 방식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자. 자기 배려의 시간은 바로 그것이다. 자기 배려, 미셀 푸코의 어려운 철학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살아보자는 것이다. 조금 더 자유롭게 말이다. 내일 지구가 망해도 오늘 하고 싶은 파티는 하자는 것이다. 누구도 내일 지구가 망할지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이 자신에게 주어진 파티의 마지막 시간일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이 당신이 당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와 보내는 마지막일지 모른다. 명령해야하는 약자나 적이나 타자가 아닌 마지막으로 주어진 소중한 인연일지 모른다.
유대칠
2021 03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