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 속에서 영원을 보라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찰나 속에서 영원을 보라
< 순수의 전조 >
윌리엄 브레이크
‘좋았던 날’의 기억은 구체적이지 않지만 ‘좋았던 순간’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수학적으로 인생은 하루하루의 시간의 총합이지만, 논리적으로 인생은 순간의 합집합이다. 물흐르듯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어떤 에너지를 감지할 때, 그 순간은 인식된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던 그 순간,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의 순간,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순간,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을 직면했을 때의 순간...
결국 그런 순간을 담은 때가 좋은 시간이 되고, 그 시간이 담긴 날이 잊지못할 날이 된다. ‘잊지 못할 그날’의 모든 순간이 좋았던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순간의 기억이 모든 것을 괜찮게 만든다.
올해만 돌아봐도 그랬다. 올해의 좋았던 사건들을 꼽았을 때, 떠오른 것들은 어떤 여행이나 어떤 만남, 어떤 과정이라기보다, 또렷하게 인식되는 어떤 순간들이었다.
# 아주 춥고 어두운 밤, 한밤중에 고개를 들었는데 한가득 하늘에 쏟아진 별빛을 보았을 때. 정말 기대하지 않고 있던 풍경이라, 한참을 입벌리고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춥고 어두운 밤이 ‘별이 반짝이는 밤’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밤이었다. 이날 밤, 나는 나에게 주문처럼 속삭였다. “오늘 본 밤하늘의 별들을 두고두고 기억하게 될 것 같아.” 때때로 이런 주문이 효과가 있다.
# 이사온 집에서 나무를 주문해 손수 씨디장을 만들어 완성했을 때- 근사한 원목 씨디장이 마치 우리 집의 인장같은 풍채로 자리잡고, 모든 씨디가 제자리에 들어가있었다. 문을 열면 바로 씨디장부터 보이는 그 풍경을 봤을 때. 마치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보는 것만 같은 황홀감을 느꼈다. 그 한 장면이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 리스본의 한 공원에서 저녁무렵부터 도시에 불이 켜지길 기다렸다. 어두워지기 직전, 하늘이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어버렸을 때....!! 가끔 그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모든 것에 대한 감사와 찬사가 터져나온다. 그때도 알았다. 오늘 본 풍경은 내가 평생 못할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아득하고 꿈만 같은 기억... 재미있는 건, 여행 자체도 좋았지만, 여행 자체가 어떤 인상으로 남지 않고, 분명 어떤 황홀한 ‘순간’들의 총합으로 여행이 남아있다.
# 공부를 하다가 아주 작은 능선을 넘어선 기분이 들었을 때- 지난 주 여느 때처럼 과제를 하다가 문득 제시된 리포트에 관해 질문할 거리가 생기고, 나의 의견이 생겼다. 이건 너무나 놀라운 경험이었는데, 이제까지 ‘왜 이렇게 논문을 읽어도 읽어도 남는 게 없을까? 내 생각이라고 할 만한 게 하나도 없을까?’ 한탄만 해왔기 때문에. 분명 올초만 해도 그저 더러운 물에 빠져 어푸어푸 헤엄치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더 깊은 물에 잠수해, 주변 지형을 살피는 정도 까지 됐다. 아주 가끔 이런 순간이 있다. ‘아, 뭔가 보인다. 더 가봐야겠다’
올해, 아직은 차마 좋은 한해였다고 말할 수 없는, 좋은 기억보다 쓰린 기억이 먼저 떠오르는 2020년을 버티게 해준 것은 이런 순간순간들이었다. 이런 순간에 대해서는 열가지도 넘게 쓸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내가 하루를 보내고 계획을 짜는 데도 관점을 바꾸게 만들었다. 좋은 순간을 가지면 된다. 그것은 좋은 하루를 보내야지, 하는 것보다 훨씬 밀도 있고 구체적인 계획처럼 느껴졌다. 하루의 시간이 전부 훌륭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오후 2시까지 별일 없는 오늘 하루라고 하더라도, 내가 오후에 ‘좋은 순간’을 갖는다면, 오늘 하루에 가진 ‘좋은 순간’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오늘 하루는 충분히 만족스러울 거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집중해서 읽는 것.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여유롭게 음악에 마음을 맡겨보는 일.
온몸의 감각을 활짝 열어둔 채 유튜브로 운동을 하는 일.
이런 일들 속에서도 좋은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결국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느냐,라기보다 그 일을 얼마나 밀도 있게 경험하느냐의 차이일 테니까.
나는 오늘 좋은 순간을 갖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썼다.
* 남은 2020년, 매일매일 한해를 타오르는 눈빛으로 응시하는 중입니다.
01. 나의 2020 연말정산: 타오르는 2020년의 초상
03. 괜찮은 척, 끝내지 않아 다행이다. 찮괜찮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