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지키는 것 못지 않게 기댈 줄 아는 것도 사랑이었다
메타데이터를 입력한 PPT를 완성하여 디자인 작업에 착수했다. 나 혼자 하는 아카이빙 작업이지만, 디자인만큼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언제나 잘하는 사람이 잘하는 영역을 책임지고 일하는 것이 성과가 좋다. 꼭 한번 같이 일해보고 싶었던 디자이너 동생H를 디자이너로 영입하고 계약했다. 그간에 진행된 작업을 충분히 설명하고, PPT로 구성한 아카이브를 공유하며, 책 페이지에 PPT를 어떻게 녹여낼지 함께 고민했다.
경우에 따라 한 페이지에 한 장, 연결성 있는 내용은 두 장의 일기를 삽입하여 가독성 있게 편집했다. 최대한 일기를 돋보이게 하고, 메타데이터는 깔끔한 명조 폰트로 작게 입력했다. 너무 투박한 책의 꼴이 되지 않도록 A5 사이즈로 작업했다. 나중의 얘기지만, 어차피 책에 실린 기록의 분량이 대단히 많지 않으니, 아예 큰 도록의 꼴로 편집했어도 좋았겠다 싶다. 이미지 편집은 H가 도맡아서 했는데, 마음에 쏙 들만큼 깔끔하게 나와서 나는 깨진 이미지가 없는지, 오타는 없는지 검토하는 식으로 일을 나눠서 했다.
일기를 배열하고 보니 시기별로 6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었고, 각 단락에 소제목을 붙였다. 소제목을 붙인 페이지에 일기장을 촬영한 이미지로 단락의 표지를 만들고자 했다. 중간중간 쉬어가는 표지가 되어줄 일기장 이미지는 좋은 퀄리티의 사진이 필요했다. 인터넷에서 배경지를 사고, 나름 조명을 설치해서 다양한 형태의 일기장 이미지를 직접 촬영했고, 촬영본 중에 디자이너 H가 선별하여 중간표지 작업을 해주었다.
표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표지를 어떻게 꾸밀지 며칠 고민했다. 만약 이 일기아카이빙북이 독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일기장 이미지로 깔끔하고 친숙하게 디자인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아카이빙북의 독자는 오로지 나이고, 나를 위한 책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히 나에게 필요한 표지를 구상했다.
그러니까 서른이 넘은 내가 10년, 15년 전 일기를 쭉 읽고 난 감상, 혹은 그때의 나에게 더해주고 싶은 것을 떠올리려고 했다. 지금의 내가 10년, 15년도 더 어린 나에게 주고 싶은 이미지와 워딩을 떠올렸다. 그게 더해지면 이 일기아카이빙북의 이야기가 완성될 것 같았다.
오래 전 일기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독립적인 아이였는지 다시금 알게 됐다. 나는 언제나 스스로 일을 찾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친구였고, 나도 그런 친구들을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누가 친구들을 괴롭히면 내일처럼 달려들어 싸우기 일쑤였으니까. 아빠와 엄마가 나랑 상관없이 자신의 행복을 위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독립적인 어른이니까. 어른이 되는데 외로움쯤이야 감내하는 것이라고 다독였다. 그래서 일기 속에 나는 독립적이었고, 그래서 종종 외로웠다.
사랑이 없어서 친구가 많지 않아서 외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고, 혼자서도 외롭지 않을만큼 강하고, 사랑받되 독립적인 여성이 되고 싶다는 모순적인 꿈을 꾸면서 괴로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그때의 나를 보니, 나의 외로움은 단순히 혼자 놓여서 느끼는 외로움이 아니었다. 하도 스스로 독립, 독립 만세 따위를 외쳐대다 보니, 쉬이 누군가에게 기댈 줄도, 책임을 나눌 줄도, 의지할 줄도 모르게 된 이의 외로움이었다.
그냥 기대봐. 옆에 있는 사람한테. 엄마한테. 친구한테. 감정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도, 불안하다 싶어도 어떤 건 그냥 믿고 넘어가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니까. 기대는 것이 맹목적으로 남에게 의지하고, 민폐를 끼치는 것이 아니야.
누군가를 지켜주는 것 못지않게 누군가를 온전히 믿고 기댈 줄 아는 것도 용기야.
누군가에게 진짜 기댈 수 있어야, 그 사람도 언젠가 내게 그렇게 기대도 괜찮다고 생각할 테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기대봐. 정말 그런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곁을 지켜주고 있다고, 내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내 주변에 여러 사람이 애써주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덜 외로워하라고.
투박한 그림이지만,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마음 한편이 후련해졌다.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20대의 일기들을 이 그림으로 든든하게 두르고 나면, 기록 속에 담긴 시간이 단단하게 매듭지어질 것 같았다. 내가 지금이라도 배우고 익혀야 할 감각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어쩌면 이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나는 내 안에 어떤 구멍을 매꾸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의 일기 아카이빙북이 완성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