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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Mar 27. 2022

'일기 아카이빙'을 통해  발견한 10가지

13. 과거의 기록이 오늘의 선택에 영향을 끼친다

나의 '일기 아카이빙북'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느루양



1. 선택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일기 아카이빙 작업을 시작하게 된 까닭은 기록학을 공부하면서 직접 기록을 정리, 관리해보고 싶다는 직업적 의욕, 그리고 과거의 지난 시간을 다시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나 자신과 화해하는 경험을 갖고자 한 일이었다. 언제였더라. 어떤 선택 앞에서 내 결정이 불현 듯 자신 없어진 밤이 있었다. 왜 이렇게 확신이 없을까? 자꾸 실패하는 쪽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이상한 망상이 들었다. 나 자신에 대한 확신, 내 경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사실 현재의 혼돈으로 뭔가 기억나지도 않았따. 그때 내 일기가 떠올랐다.    



2. 확인해보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성급한 사람은 아니다. 남들보다 결정을 빨리 내리는 편이긴 하지만, 경험에 의한 직감과 꽤 오랜 시간 고민이 더해진 결과였다. 지금 나에겐 결정의 결과물만 남아있지만, 기록을 찾아보면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왜 그런 선택을 내렸는지, 왜 나아가기로 혹은 멈춰 서기로 결정했는지 결정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일기에는 숱한 고민의 기록이 대부분이었고, 놀랍게도 끔찍하게도 많은 경우, 아니 언제나, 아니 매해 비슷한 고민을 끌어안고 살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뭘까?' '진짜 사랑이 있을까?' '친구를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그만둘까 말까?' '근데 할 수 있을까?' '근데 할 수 있을까?' '근데 할 수 있을까?'       



3. 잊고 있었는데 원래 있었던 것      


예상하던 나와 예상치못한 나를 만나게 됐다. 예상하던 나? 호기심이 많고, 의욕도 많고, 덜렁대고, 쉽게 마음을 뺏긴다. 하지만 체력이 약하고, 심력도 크지 않아 돌도 씹어먹을 것같던 의욕적인 마음은 금세 사그라들어 금새 다른 것에 눈과 마음을 빼앗기고, 저 혼자 자괴감에도 잘 빠진다.


예상하지 못한 나? 의외로 의지가 강하고, 끈질긴 면도 있다. (‘의지가 강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심리테스트에도 그렇게 나왔다는 일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난 한번도 내가 의지가 강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10년 전 고민을 여전히 하고 있는 나를 봐라(...) 10년 전 꿈꾸던 일을 여전히 꿈꾸고 있는 나를 봐라. 10년 전 바라던 일 중 몇 가지를 이룬 나를 봐라. 이것은 한결같음과 다른 추구이고 의지다. 나에 대해서 새롭게 발견하는 순간이 있었다. 잊고 있었는데 원래 있었던 나의 자질, 자산을 새로 얻은 기분이었다.



4.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언젠가 꿈꿨던 적이 있었다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 어떠한 고민과 선택에 의해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 최초의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까지의 커리어, 즉 선택의 결과만 두고 봤을 때, 내 커리어는 일관성이 없게 보인다. 글 썼다가, 방송했다가, 스타트업했다가, 촬영했다가, 강사했다가... 이 일관성 없음이 나의 묘한 콤플렉스였는데, 기록을 바탕으로 다시 나의 길을 되짚어보니, 생각만큼 그렇게 뒤죽박죽이거나 뜬금없는 경로는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고, 이야기 안팎의 사람을 만나 그 이야기를 생생하게 듣고자 했고, 이를 위해 현장에 나가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들은 이야기는 글로, 때로는 영상으로 전달하고자 애썼다. 그러니까 내가 평생 한 일은 남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그걸 내 관점으로 잘 전달하는 일을 해왔다. 내 다양한 직책과 직무는 이 커다란 범주 안에 포괄된다. 이렇게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있었고, 이루고 싶은 방향으로 계속 노력했고, 일관성 있는 선택을 내렸다.


더 이상 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때, 사무실에 발이 묶여 현장으로 나갈 수 없을 때, 내 관점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없을 때 나는 일을 바꾸거나 회사를 옮겼다. 큰 그림에서 보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하는 일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금처럼 글을 쓰는 게 업이 되고, 영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기까지 꽤 오랜 시간동안 애쓰고 고민하고 노력해온 결과인 셈이다. 그게 소위 성공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지만 봐봐. 분명 예전의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하고 있잖아.



5. 감정보다는 이성이 주관하는 아카이빙     


이렇게 내가 가진 것 뿐만 아니라 내가 놓친 것, 내가 이루지 못한 것 역시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간절히 원했지만 이루지 못한 일, 혹은 실패한 일도 지금의 시점으로 보면 인과관계가 자명하게 보였다. 과거의 일기를 읽는 일은 과거의 나를 온전히 혼자, 은밀히 만나는 작업이었다. 일기장에는 좋은 일보다는 고민이나 괴로운 이야기가 훨씬 많기 때문에, 이 만남은 훈훈한 추억 여행이기보다 고역에 더 가까웠다. 굳이 장점을 꼽자면, 나의 내밀한 짠함, 괴로움, 기쁨과 슬픔을 다시 경험하는 동안 나와의 내적 친밀감이 높아진다는 것 정도.


하지만 이 작업은 결코 감정에 치우쳐있지 않았다. 단순히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이것들을 아카이빙 하면서 정리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은 내 시간의 지도를 그리는 작업처럼 느껴졌다. 감정이 뚝뚝 떨어지는 일기를 수치화하고, 주제, 장소, 시기별로 분류하고, 거기서 의미있는 기록을 선별하는 작업은 감정보다는 이성이 주관하는 작업이었다.      


일기장, 일기기록과 메모, 박물이 총집합되어 재구성된 나의 시간들 @느루양



6. 도넛의 발견, 나만이 보낼 수 있는 위로


사실 커다란 사건 외에 일기장에 써 있는 일들이 거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이런 생각을 했다고? 이런 친구가 있었다고? 자그마치 15년 전 기억인지라, 가끔은 남이 쓴 일기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런 기록을 읽다보면 그때 그 삶의 결핍, 마음속에 생긴 동그란 도넛 같은 구멍이 보인다.


나이를 더 먹고 경험치가 생겨서, 이제는 면접자가 아니라 면접관에 자리에도 앉게 되고, 한참 어린 면접자의 말 한마디에서 의중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처럼, 이제는 내 글 속에 담긴 의중이 읽힌다. 덕분에 나는 그 구멍, 그 도넛을 발견하고 일종에 위로와 격려하는 행위를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 행위를 통해 뭔가 정말 좀 해소된 기분이 들었다. ('단 한명의 독자를 위한 표지 만들기' 참고)



7. 삶을   긍정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에 일기아카이빙북을 만든다고 했을 때, 누군가 나에게 이런 우려를 표한 적이 있었다. 내가 남기고 싶은 기록만 추려서 남에게 보여주기식 아카이빙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아무래도 독자를 염두에 두면, 기록을 선별하는데 전시하고자 하는 욕망이 발현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독자를 나 하나로 정했다. 이것은 온전히 나를 위한, 나를 돕기 위한 책이라고. 그러니 잘했고 못했고를 떠나 온전히 기준을 나의 선택, 무엇을 선택했고, 그 바탕의 고민은 무엇이었는지를 명확히 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또 하나, 기록에 잠식되지도 취하지도 않도록, 일기를 읽어나가는 틈틈이 생각이나 마음을 명료하게 해줄 책을 같이 읽어나갔는데 그 중에 하나가 『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는가』(이진경/xbooks)이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 강의록인 이 책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의 ‘힘’과 ‘의지’는 각각 양적, 질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이 중 '의지'란, 현재보다 고양된 생존능력을 향해 자신이나 환경을 바꾸려는 힘이고,  의지는 본성적으로 긍정이다. 이 ‘의지’의 질은 ‘긍정'과 '부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니체는 긍정에 긍정을 권한다. 첫 번째 긍정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 긍정은 자신이 긍정한 결과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다. 원하는 선택을 했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돈이 벌리지 않아서, 성공하지 못해서 등등 두 번째 긍정을 하는 일은 쉽지 않다고. 그래서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두 번 긍정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일기아카이빙을 시작하기 전의 내가 바로 첫 번째 긍정과 두 번째 부정의 상태였다. 뭔가 마뜩치 않고 충분치 않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때 마뜩찮음의 기준은 다른 사람의 성취와의 비교, 세상이 말하는 내 나잇대의 성취와의 비교였다. 하지만 아카이빙 작업을 하는 동안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에 몰두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그 두 번째 긍정, 있는 그대로의 긍정이 무엇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8. 과거의 기록이 

오늘의 선택에 영향을 끼친다


나 혼자 이런 걸 발견했고, 긍정하게 되었다고 떠들었지만, 이 제작기는 그저 잊지 않게 이 일의 과정과 느낀점을 기록한 것 뿐이다. 돈도 되지 않고 베스트셀러도 결코 되지 않을 '일기 아카이빙북'이지만, 니체의 두 번째 긍정을 (조금이나마) 체득한 것, 이 과정에서 얻은 나에 대한 정보, 확신, 믿음 등 체감하고 눈으로 확인한 일련의 심상들은 나에게 두고두고 남아 분명 나의 다음 선택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그랬다. 이 책을 만들고 난 후에 나는 전보다 덜 불안했고, 내가 보내온 시간에 대한 미약하나마 믿음이 생겼다. 걱정만큼 망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조금 더 생겼다.      



9.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과 아쉬움     


독립출판하는 과정을 알게 되고 경험했다. 일기아카이빙북 전체 과정에서 독립출판에 관한 부분은 아쉬운 점이 많다. 종이의 선택, 표지의 선택, 제목의 선택, 시간 배분 등등 이런 일련의 과정은 정말 다시 한 번 더 하게 되면 이번보다는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애써 만들었는데(무려 50부나 인쇄했는데) 집에 고스란히 쌓여있다는 점. 누구에게도 건네기 어려운 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아쉬운 마음에 이렇게 구구절절 제작기를 기록했다.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책장에 꽂아두니 가끔 정말 꺼내보고 읽게 된다. 예전처럼 일기장을 상자에 담아 어느 구석에 처박아두지 않고, 이렇게 쉽게 꺼내볼 수 있는 책이 되었다는 점은 다시 생각해도 만족스럽다.      



10.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추천!  


아카이빙은 시간이 정말 많이 걸리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날 인형에 눈알 붙이는 심정으로 한 장 한 장 기록을 스캔하고, 엑셀을 채워나가기도 했다. 돈도 명예도 되지 않고, 성공도 실패도 없는 일이지만, 내 한 시절을 정리하는 기분은 꽤 각별했다. 이 글을 보는 누군가도 그동안 써둔 기록이 있다면 개인기록 아카이빙을 권한다. 일기가 아니더라도 사진이든 그림이든 어떤 개인기록이라도 내가 보낸 시간을 경험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일기가 없다면? 자료부터 모은다 생각하고, 이제부터 써서 몇 년 뒤에 아카이빙 하면 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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