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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May 19. 2018

나 하나쯤 망해도 아무도 모를거야

3번의 이직, 그리고 스타트업까지- 다사다난 직장생활(1) 

나는 지금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 

그게 가끔 낯설다 


어떻게 된 일일까? 아침에 눈을 뜨면, 불현듯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회사를 가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이지?

회사 대신 스타트업을, 그러니까 내 업을 스스로 일으켜보고자 매일 아침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급여가 없는 나날이기라 매일 밖에서 사먹는 점심값이 살짝 부담이 된다. 

직장생활 열심히 하다가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어떻게 된 일인가? 모든게 낯설어진 어느 날 밤,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기나긴 나의 직장생활을 되돌아보기로 했다.  


 뒤돌아봅니다. 나의 직장생활


01. 공연계의 키보드 워리어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그러니까 2007년. 

나는 공연계에 막 발을 들인 인턴 기자였다. 


뮤지컬 프레스콜 한번 다녀오면, 사무실에 앉아 기사 8개 정도를 뚝딱 써냈다. 인터넷 언론사는 그런 곳이었다. 공연에 대한 리뷰 말고도,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한 작은 정보까지 캐치해 눈에 띄게 놀란척을 하며, “주인공 뫄뫄씨가 공연 내내 입고 나오는 주홍색 드레스에 감춰진 사연은 바로바로!!” 호들갑스럽게 제목을 뽑아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뚝딱뚝딱 기사 8개 정도를 송고 하고, 퇴근 후에 리뷰를 쓸 다른 공연을 보러 나가곤 했다. 처음으로 배우 인터뷰를 진행하던 날이 생생히 떠오른다. 장영남 씨였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안경을 쓰고 나를 ‘똥그란’ 눈으로 보며 하나하나 대답해주던 표정만큼은 선명히 떠오른다. 


그리고 박철민 씨 인터뷰도 했다. 몇명 더 했을 거다. 기사에 번호가 붙어서 기억하는데, 1년에 100건 정도 기사를 썼다. 옆자리에는 클래식 분야를 담당하던 조뫄뫄 씨가 있었는데, 우리가 두고두고 가까이 지내는 벗이 될 줄은 그땐 몰랐다. 



읽고 쓰고 말하는 게 전부였던 날들, 일하는게 순수하게 즐거웠던 시절


02. 매주 인터뷰를 네 건씩, 사람 도서관을 짓다  


대학을 졸업하고 인터넷 서점에 입사했다. 미디어콘텐츠를 다루는 부서였고, 나는 그 부서의 ‘취재기자’로 뽑혔다. 미디어콘텐츠 부에서 만드는 웹진의 최초의, 유일한 취재기자였던 셈이다. 해야할 일도 많았지만, 그만큼 할 수 있는 일도 많았다. 주된 업무는 신작을 낸 작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는 일이었고, 일하는 3년 남짓 시간동안 200여명의 저자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영화와 공연 분야가 신설되면서 문화 다방면의 기사를 썼다. 그해 여름, 대중문화 칼럼을 기획했는데 당시 마땅한 필자가 없었다. 내가 다른 필명으로 글을 써서 혼자 몇명인척 칼럼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가상의 필자의 글을 보고 데이즈드 컨퓨즈드라는 잡지 회사에서 그 가상의 필자에게 청탁이 들어오기도 했다@@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네. 칼럼을 모아 책으로 내기도 했다. 하지만 웹진이 잘되면서 점점 취재기자 영역 외의 일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소속이 언론사가 아니라 기업이다보니 맨날 기사 건수를 세고, 트래픽 보고서를 만들고, 소속도 어느 순간 마케팅 부서로 바뀌었다. 좋아. 아직 젊으니까 진짜 기자가 되자! 고 마음 먹었다. 처음 퇴사를 했고, 통장에 예상보다 많은 돈이 들어왔다. 퇴직금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어쨌든 전 직장 생활로 남은 것들이니 깔끔히 정리하고 새 출발하자,라는 마음으로 비행기표를 끊어 무작정 이탈리아로 떠났고, 혼자 북부 구석구석 여행을 했다. 


스페인도 갔었지 계획 없이도 하루하루 좋았던 날들


03. 인터미션 - 얼토당토 가든파이브 


이탈리아 베로나 한 수도원에서 머물고 있을때, 서울에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행 떠나기 직전에 창업지원센터에 냈던 기획서가 서류 합격을 했으니 면접을 보러 오라는 소식을 들었다. 여행한지 보름이 넘어서 한국에 돌아가는 건 아쉽지 않았는데, 면접날까지 돌아가는 비행기를 찾을 수 있을까?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면접날 오전에 한국에 떨어졌다. 트렁크를 들고 창업센터에 가서 면접을 봤고, 얼토당토않는 말을 하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합격했다. 그렇게 첫번째 창업의 세계(그때는 스타트업이라고도 안했다.)에 발을 들였다.


문정동 가든 파이브에 내 사무실이 생겼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고 친구가 화분까지 보냈다. 이전에 문화부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언젠가 해보고 싶다고 꿈꿨던 교육 콘텐츠를 만들기로 했다. 창업센터 쪽에서는 출결관리를 하고, 매달 보고서를 받고, 몇 십 만원 정도 매달 지원금을 줬다. 


갈곳이 없었으므로 매일 열심히 출근해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하루 종일 글만 쓰고 있자니 좀이 쑤셔 견딜수가 없었다. 주변에 교류할 만한 창업가도 없어서, 내가 뭘하고 있는 건지 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첫번째 창업을 끝내지도 못하고 흐지부지 끌고 있었는데, 마침 가장 가고 싶은 뉴스뫄뫄 언론사에서 인턴 공고가 떴고, 냉큼 지원했다.


창업 사무실 입주한 첫날, 친구가 화분을 보냈다. 세상 감동ㅠ


04. 시작은 미약하였는데 끝은 과연 


나의 두 번째 직장. 원래는 인턴이라고 해서 취재기자도 아니고 촬영기자 직에 용감하게 지원을 했는데, 면접을 보러가니 인턴이 아니라 정규직으로 채용한다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최종 10명 면접후보 중에서 내가 뽑혔다.@@ 


나란 사람이 괜찮아 봬는데, 경력이 1도 없어 걱정했던 면접관들이 2:2로 나뉘어 의견을 나누다가 이렇게 결정했다고 통보 받았다. 6개월 정도 교육해서 혼자 기자회견을 커버할 수 있을 정도로 자라면 영상팀에 남기고, 그렇지 못하면 회계팀으로 옮기겠다고. 당시에는 닥치고 입사하고 싶은 회사였기 때문에 무조건 오케이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촬영을 1도 모르는 나님은 촬영 기자로 거듭나기 위해 밤낮 바짝 엎드려 수련하고, 수련하고... 매일 욕을 배불리 쳐드시느라 점심도 저녁도 필요없게 되고, 매일 밤 눈물로 일기장을 적시게 되는데…. (또르르) 그렇게 촬영기자로 4년을 일했다. 


이 직장에 대해서, 박근혜 정부와 함께 시작해, 박근혜 구속 날 마무리됐던 내 촬영 기자 생활에 관해서는…. 하아.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요약할 수가 없다. 퇴사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었다.  


향후 5년, 10년 뒤를 떠올려봤을 때, 여기서는 내가 되고 싶은 내 모습에 가까워질 것 같지 않았다. 나에게도 역량이 되는 강점과 약점이 있는데, 회사 생활에서 나는 강점을 발휘하기보다는 부족한 점을 채워야 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년 동안 최선을 다해 일했고 그 일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알았다. 다음 징검다리는 마련해놓지 않았지만, 그 확신 하나 가지고 뒤돌아보지 않고, 퇴사의 강을 건넜다. 물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지금이라면...... "자, 잠깐만! 조또마떼 구다사이!"를 외치며 나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좀 해주고 싶구나. 하지만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도 나는 퇴사를 했을 거다. 


그리고 퇴사하고 나자마자 또 다른 징검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째서 내가 망하면 아무도 모르게 될까요? 안물안궁 모든 이야기는 내일 이시간에.. (북치고 장구치고) 



#덧붙일말이 많지만 오늘은 이직개론 

#많은 일이 있었다

#다음회에 계속



https://brunch.co.kr/@summer227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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