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야(초6)
합천에서 열린 학생체육대회에서 레야가 800미터 2등을 했다!! 운동하면 뒤지지 않는 얀이도 못 받아 본 메달을 은둔형 사춘기 레야가 받았다. 처음에 레야가 800미터 나간다고 했을 때 유례없이 남편이 화를 냈었다. 왜 하필 제일 힘든 800미터에 우리 애를 보내느냐고. 동감이었다. 얀이가 나간다고 했으면 묻따말 오케이였을텐데 레야가 나간다니, 뛰다가 운동장에서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애가 쓰였다. 그렇게 큰 애와 작은 애를 보는 우리 마음은 달랐다.
다른 종목도 연습이 필요하지만 800은 특히나 준비 없이 나가면 낭패를 본다. 그래서 경기도 경기지만 평소 연습량부터 빡세다. 매일 운동장 10바퀴는 기본으로 돈다. 아침에 입맛 없다고 밥도 안 먹고 가는데 매일 운동장을 그만큼 돌며 훈련한다고 하니까 준비기간 내내 마음이 안 좋았다. 집에 오가는 차 안에서 레야는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안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총 4명의 선수가 출전하는데 그중 한 명은 2년 연속 우승한 우리 학교 학생이고(레야가 5학년 때 나는 타학교로 전근을 갔다), 한 명은 '괴물'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다크호스고 나머지 한 명에 대한 정보는 없다. 고생해서 뛰어봤자 3등 아니면 4등일 것 같았다. 4명 중 4등이면 상도 없고 명예도 없다. 그걸 보고 있으라고? 그러나 우리의 우려와 달리 출전에 대한 아이의 의지는 강했다. 연습하는 게 힘들다고는 하지만 불평은 하지 않았다. 아이가 포기하지 않으니 우리는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경기 당일. 차라리 안 봤으면 좋겠는데 어쩌다 보니 나도 학교 인솔자로 뽑혀 대회장에 가게 됐다. 학교 아이들을 챙기면서도 틈틈이 곁눈으로 레야를 살펴보았다. 괜찮은 거지? 괜찮은 거지? 뛸 수 있지? 아이보다 내 심장이 더 터질 것 같았다.
노출이 많은(?) 학교 운동 유니폼을 입고 운동장에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은 꽤 멋있었다. 언제 그렇게 자랐는지 다리에 근육이 탄탄했다. 방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하얗고 파리할 것 같은 예상을 깨고 어느새 골격이 제법 애티를 벗고 있었다. '꼴등만 하지 마라, 꼴등만 하지 마라' 무슨 주문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아이의 상심한 모습을 지켜볼 자신이 없어서다. 아... 보면 볼수록 아이가 뛰어야 할 공설운동장은 넓었다. 너무너무 넓었다. 저 넓은 운동장을 2바퀴나 뛰어야 한다. 완주나 할 수 있을지...
총소리가 울리고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아이는 괴물이라고 불리는 아이와 거의 동시에 들어왔다. 둘 다 얼마나 승부욕이 강한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자칫 파울로 실격될 뻔하기까지 했다. 아이는 결승선 앞에서 넘어지며 그대로 쓰러졌다.
2등. 은메달.
담임 선생님은 1등 할 수 있었는데 아쉽다고 하셨지만 나는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1등이 괴물이라며? 그 애와 나란히 들어왔으니 우리 애도 실력은 뒤지지 않았다. 3등 하고 거리도 꽤 되었다.
레야는 평발이다. 얼마 전에 척추측만증 진단도 받았다. 그럼에도 아이는 평소보다 10초나 당겨진 기록으로 들어왔다. 그만큼 죽을힘으로 뛰었다는 거다. 포기하지 않고... 눈물이 난다.
"선수 입장!" 퇴근길에 아이를 다시 데리러 갔더니 학교에서 치킨 파티를 하고 나온 아이가 차에 타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레야, 엄마는 1도 아쉽지 않아. 기분이 너무 좋아."
"엄마보다 제가 기분이 더 좋아요."
1등에게 2등은 실패의 의미다. 하지만 밑에서 올라온 자에게 2등은 환희고 보람이고 기쁨이다. 우리는 충분히 기쁘고 넘칠 만큼 행복했다.
얼마 후, 군 육상부 코치에게서 연락이 왔다. 얼마 후에 있을 도대회에 출전해 보지 않겠냐고. 2등이지만 기록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좀 더 훈련하면 가능성이 있어 보인단다. 아이와 나는 똑같이 "NO"라고 말했다.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했지만 경험도 절제가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