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나는 생각지도 못한 문제로 우리 우정에 위기를 맞게 되었다. 아빠는 필이와 만나기로 한 나에게 갑자기 과제를 주었는데 이번엔 고백을 받고 냉정하게 거절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담아 오는 것이었다. 나는 1초도 걸리지 않고 바로 린을 떠올렸다. 린이라면 단번에 해결될 것이다. 나는 필이에게 조금 늦는다고 말하고 린을 언덕으로 불러냈다.
“린,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뭔데? 필이는 왜 없어?”
필이는 지금 땅콩과 호두를 넣은 도토리묵 레시피를 위해 산으로 갔다. 나도 빨리 일을 마치고 필이한테 가야 한다. 숲 속을 모험하는 것은 필이와 내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이다.
“필이는 지금 없어. 너랑 나 둘 뿐이야.”
“...”
나는 숨을 한번 가볍게 쉬고 준비해 온 말을 꺼냈다. 살짝 심장이 떨려왔다. 오늘 나는 연기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한 번에 이 일을 끝내야 한다.
“사실 나 오래전부터 네가 특별하게 느껴졌어.”
“... 뭐야? 왜 이러는 건데?”
코웃음을 칠 거라 예상한 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빨리 고백해서 거절을 당하고 필이에게 갈 생각만 하느라 그것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나 아무래도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
“너와 사귀고 싶어. 괜찮다면 나랑 사귈래?”
나는 말하면서도 일부러 린과 조금 거리를 두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뺨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린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몰래 채집 항아리를 열어 뒤로 숨기고 있었다. 린이 거절을 하면 이 항아리를 보여 주며 미안하다고 하면 된다. 한동안 후유증이야 있겠지만 지금 인간세계로 갔다 오기에는 시간이 없다. 그리고 이런 건 늘 해오던 일이기 때문에 린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나는 이보다 더한 것도 해주지 않았나. 미리 얘기하고 연기를 할 수도 있지만 가짜는 품질이 좋지 않다. 도대체 이런 노래는 누가 쓰려고 하는 건지.
“...”
린이 말이 없다. 빨리, 빨리 거절을 해. 도토리 따러 가야 한다고.
“몰라.”
린이 그 한마디를 남기고 저 멀리 뛰어간다. 몰라? 뭘 몰라? 싫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데 왜 몰라야. ‘싫어, 내가 왜? 미쳤어? 너랑 사귀느니 개구리를 내 애인이라고 하는 게 낫겠어.’ 린의 성격으로 미루어 내가 상상한 모든 말들이 빗겨 나갔다. ‘나랑 사귈래?’ ‘몰라’ ‘나랑 사귈래?’ ‘몰라’ 나는 필이가 있는 산으로 가면서 린과 나의 말을 계속 되돌려 보았다. 뭐야, 얘.
“일은 잘 해결했어?”
“어? 어. 아니.”
“실패야? 린이 만나서 금방 하는 거라면서. 뭔데? 내가 해줄게.”
이번엔 네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친구야. 필이는 도와주겠다며 계속 물었지만 나는 채집내용이 뭐였는지 말할 수 없었다. 하여간 린은 도움이 안 되는 애다.
“필아, ‘몰라’라는 말이 다른 뜻으로도 쓰이는 거냐?”
“응? 몰라.”
“아니, 모른다는 뜻 말고 다른 뜻이 있나고.”
“몰라. 진짜 몰라.”
됐다. 나도 모르겠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근데 왜 자꾸 그 얼굴이 생각이 나냐. 볼이 빨개진 것도 같은데, 화났나? 그렇다면 더더욱 모르겠다. 화났으면 그냥 순순히 갈 린이 아니다.
린의 대답의 의미를 다음날 나는 바로 알았다. 내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혹시? 했던 의혹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 나를 쳐다도 보지 않던 클래식베이비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향해 있었다. 그 애들은 내가 부담을 느끼든 말든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뭐라 뭐라 말하고는 히죽히죽 웃었다. 더 웃긴 건 린의 등장이다. 레이스가 잔뜩 달린 원피스를 입은 린은 머리에도 커다란 핑크색 리본을 달았다. 볼터치는 유난히 붉었고 입술도 반짝거렸다. 린이 나타나자 그녀들이 린을 둘러싸고는 또 한참 수다를 떨었다. 린과 그녀들이 자꾸 나를 쳐다봤다. 분명히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난 어제 린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고 사귀자고 이야기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그건 사실이었다. 아니 사실이 되어 버렸다. 린은 아마도 나를 찼다고 했겠지? 고백하다 차인 자가 하루 만에 얼마나 초라해질 수 있는지 나는 몸소 알게 되었다. 온몸이 화끈거렸다.
“린이 오늘 예쁘네.”
필이 눈치 없이 말했다.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이대로면 나는 진짜 린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약점이 잡힌 것일 수도 있다. 소리를 채집하기 위해 가짜로 고백한 것을 지금이라도 말할까? 아마도 나는 방귀사건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그녀에게 후폭풍을 당할지도 모른다. 결국 원하던 소리도 못 얻고 일만 크게 벌인 꼴이다. 아,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그때 린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나도 반사적으로 손을 올렸다. 내려, 내려 이 멍청아. 린이 웃자 나도 모르게 웃었다. 입꼬리 내려, 너 진짜로 세상과 작별하고 싶은 거냐? 나는 린은 물론 필이에게도 간다는 말도 없이 도망치듯 집으로 와버렸다. 뒤통수가 간질간질하고 어디로든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채집항아리를 챙겨 곧장 인간세상으로 내려갔다.
고백을 거절하는 차가운 여자의 목소리를 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은 여전히 수많은 고백과 거절로 넘쳐났다.
“미안해. 난 널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어.”
“오빠, 난 오빠랑 어색한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아. 오늘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
“형석씨는 좋은 사람이야. 나는 형석씨에게 어울리지 않아. 더 좋은 여자 만나.”
인간들의 수많은 고백의 현장에서 그들의 목소리와 감정을 담았지만 린처럼 말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초등학생도 그 자리에서 싫다, 좋다를 분명하게 말했다. 혹은 ‘생각해 볼게’, ‘시간을 좀 줘.’ 등 거절도 수락도 아닌 애매하게 여지를 남기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사랑을 거절하는 이들은 차고 냉정했다. 희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게 어떻게 예의가 될 수 있는지는 몰라도 거절당한 쪽은 상처를 입고 순식간에 절망 속으로 처박힌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그 뒷면은 그렇게 아프고 초라하다. 어떻게 해도 반쪽짜리 사랑은 상처를 받지 않을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불공평하고 자존심 무너지고 가슴 아픈 사랑을 왜 하는 걸까? 어떤 이들은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 고백하기도 한다. 바보야, 뭐야. 스스로 기름을 두르고 불 속으로 뛰어들다니. 사랑이란 눈도 멀고 귀도 멀고 가슴만 뜨겁게 남아 새카맣게 탈 때까지 꺼지지 않는 불 같다. 나는 필요한 소리를 다 모으고도 한참 동안 인간 세계에 머물렀다. 무언가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더 남아있는 것 같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