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필이는 나를 기다리다가 혼자 먼바다에 배를 타고 나갔다고 아빠가 대신 전해 주었다. 채집 항아리를 아빠에게 건네고 침대에 드러누워 잠시 쉬고 있을 때 린이 날 찾아왔다. 문을 빼꼼 열고 작은 손짓으로 나를 밖으로 불러 냈다.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가 다시 낮게 뛰었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루지 않고 린에게 사실대로 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몇 대쯤 맞아 줄 각오도 이미 되어 있다. 이 복잡한 생각의 사슬과 제멋대로 흘러가는 상황을 정리하려면 그 방법 밖에 없었다. 린은 나를 데리고 내가 고백했던 그 언덕으로 다시 갔다.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린을 따라갔다. 린은 가지고 온 커다란 피크닉 가방에서 핑크색 체크무늬로 된 돗자리를 꺼내 잔디 위에 깔았다. 아, 어색하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걸 깔고 앉았다고. 그러고 보니 오늘도 린은 레이스가 가득한 흰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양갈래로 다소곳이 땋아 내렸다. 볼터치도 그대로다. 린이 먼저 앉더니 자신의 옆을 손으로 툭툭 두 번 치며 나를 바라보았다. 앉으라는 소리다. 앉으면 도망가기 힘들 텐데. 어쩔 수 없이 나는 린의 옆에 앉았다. 가까이 앉았는데도 그녀와 내 사이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가 또 너무 가까이 느껴지기도 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빨리 이 모든 상황에서 탈출하려면 맞아 죽더라도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내가 받을 대가보다 린이 받을 상처가 더 마음에 걸려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고백하고 내가 거절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잠시 후 린은 피크닉 가방에서 낡은 두루마리 천을 꺼내 공중에 띄워 펼쳤다. 칠흑같이 검은 밤하늘에 맑고 밝은 별들이 가득한 그림이었다. 린은 손바닥으로 그림을 두 번 치고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벌렸다. 그 순간 두루마리에 있던 밤하늘의 풍경이 실제 하늘 위에 펼쳐졌다. 언덕은 그대로 밤이 되었고 쏟아질 듯한 별들이 우리 머리 위에 반짝이고 있었다. 공작단들은 자신들이 채집했거나 만든 작품들을 잠시동안 현실에 펼쳐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도 가끔 혼자 있고 싶은 날이면 음악이 담긴 유리병을 가져와 이 언덕에서 뚜껑을 열곤 했다. 그러면 아빠가 만든 음악들이 이 언덕을 감싸고 흘러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빠는 여자친구가 생기면 꼭 들고 가라고 리스트를 작성해 주기도 했다. 린이 속한 그림공작단들은 린이 했던 것처럼 수집한 그림을 풍경 속에 그대로 옮겨 놓을 수 있다. 그래서 가끔 린의 공작소 앞을 지날 때면 아침부터 노을이 지고 있거나 비도 오지 않은 하늘에 쌍무지개가 선명하게 떠 있을 때도 있다. 아주 예전에도 린은 필이와 나를 이 언덕에 데려다 놓고 그림 두루마리 하나를 펼쳤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무섭게 물이 들더니 아주 어둡고 음침한 그림자가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공포에 휩싸여 소리를 질렀고 린은 깔깔거리며 우리의 표정을 또 다른 두루마리에 담아 갔다. 그리고 그 표정은 뭉텅이인가 뭉키인가 하는 이상한 이름의 노르웨이 작가에게 흘러갔다. 완성된 그림을 보고 우리는 또 한 번 고함을 질렀다. 우리가 너무 못생기게 나와서다. 그 이후로도 린은 한 번씩 그런 식으로 우리를 이용했는데 주로 놀라거나 무서운 표정을 담아갈 때 아주 적절했다. 하지만 오늘 린이 펼친 그림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와”
나는 절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언덕 아래 생긴 호수에는 배들이 떠있고 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이 물 위에서도 그대로 반짝였다. 이런 것을 사람들은 낭만적이라고 표현한다.
“이거 엄마가 진짜 아껴서 잘 안 펴보는 건데 몰래 가져왔어.”
‘왜? 아니야 린, 그러지 마.’
나는 린의 행동이 너무 낯설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곧이어 벌어질 일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해서 아무런 말도 먼저 내뱉을 수 없었다.
“오래전 엄마가 정말 아꼈던 화가가 있었어. 천재였지만 너무 가난해서 엄마가 아주 많이 영감을 넣어 주었는데 어느 날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발작을 일으키더니 귀를 잘라버렸대. 그래도 엄마는 끝까지 도와주고 싶었지만 결국 스스로 하늘의 별이 되어버렸어. 그 화가가 죽고 나서 그림들이 엄청 유명해졌지만 엄마는 그때만 생각하면 여전히 슬프대. 슬픈 사연을 품어서 그런지 더 예쁜 것 같지 않아?”
정말 그랬다. 세상의 온갖 고민을 다 빨아들일 것 같은 까만 밤과 모든 마음을 위로해 줄 것 같은 따뜻한 별들이었다. 나는 별이 빛나는 밤 아래서 나도 모르게 뒤로 누웠다. 역시나 별들이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득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감동이 몰려왔다. 내가 눕자 린도 그대로 따라 누워 우리는 나란히 누운 꼴이 되었다. 깜짝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다시 일으켰다.
“네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많이 기다렸어.”
린이 누워 하늘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마음이 뜨끔했다.
“나를? 왜? 뭐 어려운 과제가 있었어?”
알 것 같았지만 모른 척했다. 린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라니? 원래 사귀는 사람들끼리는 그렇게 하는 거야.”
“린, 사실은 말이야. 정말 미안한데 말이야. 린, 오해는 하지 말아 줘. 아니 넌 지금 오해를 하고 있어. 린, 정말 미안해. 나를 그냥 한 대 때려. 아니 열 대 때려. 스무 대도 괜찮아. 그리고 그 말은 없었던 걸로 해. 사귀자는 말, 내가 채집하려고 거짓말한 거야.”
나는 린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는 푹 숙였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내게 올 고통에 대비했다. 그러나 한참 동안 시간이 멈춘 듯 사방이 조용했다. 린은 나를 때리지도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을 때 내가 본 것은 린의 큰 눈에 가득 담긴 눈물이었다. 별들이 린의 눈 속에 머물렀다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린이 운다. 린이 우는 것은 아주 어릴 때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때는 필이와 내가 린만 빼고 처음 배를 타고 먼바다를 여행하고 온 날이었다. 필의 부모님은 우리에게 거대한 정어리떼를 보여 주며 바다낚시를 알려 주셨고 필이와 나는 신이 나서 한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말고는 친구가 없었던 린은 우리가 올 때까지 계속 찾아다녔다고 했다. 아빠도 그때 집을 비운 터라 린은 우리가 바다낚시를 간 줄 알지 못했다. 린은 한참만에 돌아온 우리를 번갈아 때리며 자신을 배신했다고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 필이와 나는 아픈 것보다 우는 린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아주 진땀을 뺐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린이 우리의 여왕처럼 군림하게 된 것이. 필이와 나는 다시 린이 우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맞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 린이 다시 또 운다. 이번에는 때리지도 않고 소리도 없이 운다. 맞지도 않았는데 나는 누군가가 가슴을 꾹 누른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우리 사이에 해서는 안 되는 장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린은 말없이 짐을 챙기기 시작했고 밤하늘과 별들도 다시 다 걷었다. 눈부신 햇살이 다시 비쳐와 나는 잠시 눈을 찡그렸다. 린은 눈부심 따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그림이 그려진 두루마리와 바닥에 깔린 체크무늬 돗자리를 접기 시작했다. 린이 돗자리를 잡아당기자 나는 번개처럼 몸을 날려 돗자리 밖으로 물러났는데 그 순간 내 행동이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나도 그녀도 웃지 않았다. 린은 나를 다시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언덕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