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루의 등장으로 잠시 잊고 있었던 린이 다시 떠올랐다. 루에게 부탁해서 편지라도 써볼까? 아니다. 저 녀석에게 처음부터 한심한 녀석으로 보일 필요는 없다. 아빠에게 도움을 청해볼까? 아니, 아빠는 지금 새로운 작업 때문에 정신이 없으시다. 그리고 말해봤자 나에게 득 될 것이 하나도 없다. 결국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니까. 나는 린에게 한없이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린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그렇게 울 일인가? 린이 나에게 했던 그보다 심한 장난들을 떠올려 봤다. 그에 비하면 나는 거짓말만 조금 한 것일 뿐이다. 게다가 미안하다고 했고 무릎도 꿇었다. 아니 평소에 그렇게 나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 더니 진짜 나를 좋아하기라도 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방귀 소리 부탁했을 때 그 표정을 떠올려 보자. 나를 좋아한다면 내 부탁 다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린의 부탁을 거절한 기억이 없다. 우리 사이는 울어도 내가 울 일이 훨씬 더 많다. 고백했다가 차인 걸로 소문나 억울한 걸로 치면 내가 더 억울한 것 아니냐고. 나는 도저히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수많은 감정들이 교대로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사실 그러고 보면 최근 린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긴 했다. 우리보다 더 고집 세고 씩씩해서 필이와 내가 둘이서 덤벼도 어림없던 그녀가 어느 날부터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도 자꾸 우리의 도움을 요청했다. 어릴 때 우리가 안 놀아줬다고 울고 불고 하던 일을 잊었는지 우리만 보면 유치해서 못 놀겠다고 무시하고 그러면서도 다음에 뭐 할 건지, 어디 갈 건지 계속 물었다. 자존심이 강해 누구에게도 절대로 지지 않는 애가 별 것 아닌 말에도 ‘너무해!’하며 삐쳐서 집으로 가버리는 일도 많아졌다. 그렇게 영영 안 볼 것처럼 가버리고는 다음날 엄마가 만들었다면서 전혀 엄마가 만든 것 같지 않은 못생긴 초콜릿도 갖다 주었다(물론 툭 던져서 처음엔 버리는 건 줄 알았다). 그뿐인가? 어떤 때는 필이도 웃지 않는 내 유머에도 깔깔 웃으며 등을 탁탁탁탁 때렸다. 그런 것들은 그렇다고 쳐도 엄마 몰래 가져왔다는 그 그림은? 그 옷차림과 체크무늬 돗자리는? 그게 나를 좋아한다는 뜻이었나? 여자들은 좋아하면 그렇게 하나? 내 고백을 받아 준 것도 아니고 모르겠다면서? 엄밀히 말해 사귀기로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나쁜 놈이 된 것 같냐고. 나는 생각할수록 헷갈려서 생각을 그만하기로 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관계가 틀어졌고 지금 나는 영원히 린과 멀어질 것인지 아니면 다시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서 예전처럼 삼총사가 될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한다. 물론 린이 내 사과를 받아줄지는 알 수 없지만. 린에 대해 생각할수록 린의 눈물 속에 고였던 별들이 생각났다. 가슴 안쪽이 저릿해져 왔다. 린이 날 기다렸다는 말도 계속 떠올랐다. 사실 인간세계에 가 있는 동안 나도 너 많이 생각했다고 했어야 할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를 받은 아이처럼 답답했지만 일단은 당장이라도 린에게 달려가 무슨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다. 이대로 린이 영영 멀어질까 봐 두려웠다.
루가 돌아간 뒤에 나는 혼자서 아빠의 작업실에 들어갔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했다. 창고에 진열되어 있는 유리병 중 아무거나 꺼내 뚜껑을 열면 그 안에서 음악이 흘러나왔고 그 음악을 혼자서 듣는 시간이 좋았다. 유리병을 고르려다가 이번에는 루가 쓰다 만 가사가 들어간 항아리의 뚜껑을 열었다. 뭐 그리 대단한 가사를 썼길래 울고 불고 난리였던 거야? 항아리를 열자 그 속에서 슬프고도 깊은 그리움이 뭉근하게 흘러나왔다. 슬픔과 후회, 고백을 거절당한 순간들을 잔뜩 넣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친구라도 좋았어. 늘 같은 거리에 있던 너와 나. 장난처럼 내민 손도 잡지 못했어. 심장은 너를 향해 달려 가지만 언제라도 멈출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미안해. 더 이상 친구가 될 수 없어. 너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헉!”
나는 나쁜 짓이라도 하다 들킨 것처럼 뚜껑을 급하게 닫아 버렸다. 심장이 갑자기 마구 뛰어서 뻐근한 고통이 느껴졌다. 뭐야, 이 녀석! 내 얘기하는 거야? 아니, 정확히 내 얘기는 아니고. 나는 혼자서 횡설수설하는 내가 어이없었다. 세상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고 고백도 하고 이별도 한다. 그중 하나겠지. 내가 모아 온 많은 것들 중 하나의 사연일 뿐이다. 그런데 왜 내 가슴이 이렇게 아픈 거지? 린은 아직도 울고 있을까? 나는 조용히 작업실을 나와 내 방으로 향했다. 누우면 바로 자던 내가 잠자는 법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린은 아무리 삐치고 집으로 가버려도 다음날 아무 일 없는 듯 먼저 나타나서 우리를 당황케 하는 애다. 이번에도 그렇게 린이 먼저 나타나주길, 그럼 난 린에게 백 번쯤 고맙다고 말하고 진짜 잘해 줄 것만 같다.
다음 날 린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고 나도 아빠 일을 돕느라 밖에 나가지 않았다. 루는 매일 같이 찾아와 아빠와 같이 곡 작업을 했다.
“여기 좋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저녁을 함께 먹던 루가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로 말했다.
“친구를 많이 사귀었나 보네?”
“네.”
루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아빠가 다시 물었다.
“왜? 마음에 드는 여자친구라도 있었어?”
루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얼굴이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녀석이 좋아할 만한 애라면 아마도 클래식베이비들을 만났나 보다. 그 애들은 이제야 말하지만 입만 열지 않으면 예쁘긴 하다. 그런데 이별 가사 쓰는 애가 사랑에 빠지면 어쩌자는 건지.
린에게서는 아직 아무 연락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녀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이러다가 영영 멀어질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필이와 같이 아무렇지 않은 듯 찾아가 볼까? 몰래 불러 내서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진지하게 이야기해 볼까? 네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과제가 생겼다며 동정심을 유발해 볼까? 온갖 계획들을 세웠지만 막상 용기가 나지 않아 지우고 또 지웠다. 어떻게 되든 일단 그녀를 보고 싶은 생각이 머리끝에서 발 끝까지 차오르고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찾아가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린과 멀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 번도 린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 무조건 나는 그녀에게 매달려서라도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음 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을 때 필이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