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달이달꿈

영감공작소 8 (최종회)

by 최여름

“어이, 친구. 내가 온 줄 어떻게 알았어?”

필이 드디어 바다에서 돌아온 모양이다. 나는 반가움과 허탈함이 함께 들었다. 필은 몸뚱이가 반으로 잘린 참치의 꼬리 부분을 눈앞에 들어 보이면서 활짝 웃고 있었다.

“뭐냐? 이제 돌아온 거야? 나 없이 신났겠다?”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너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려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와야 말이지. 대신 엄마가 쓰고 남은 것 가져왔어.”

“이번엔 참치요리 하신대?”

“응. 이번 루키가 요리경연대회에 참가하는 중이야. 베테랑 요리사들이랑 일대 일로 붙는데 심사는 눈 가리고 맛으로만 한대. 웃기지? 다음 주제가 참치인데 참치로 면을 만들어서 참치면 요리를 하신대. 오랜만이니까 오늘은 내가 너의 참치마스터가 되어줄게. 친구.”

필은 이미 우리 집 부엌을 점령해서 참치를 부위별로 해체하고 있었다. 필의 푸른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 빛났다. 이 친구도 아직 멀었다. 그래, 너만 있으면 된다. 변함없는 내 친구, 필.

“근데 린이 말이야. 나 없는 동안 남자친구 생겼어?”

필이 크림소스가 잔뜩 입혀진 참치튀김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필도 아는구나. 하긴 그 여자애들이 온 동네 소문을 안 냈을 리가 없다. 필에게 뭐라고 해야 하나?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왜 자기에게 먼저 말하지 않았냐고 화를 내지 않을까? 아, 꼬인다 꼬여.

“그게 말이야...”

“언덕에서 어떤 남자랑 같이 있던데?”

“응? 무슨 소리야, 내가 여기 있는데?”

“그래. 너와 나는 여기 있고 린은 잘생긴 남자랑 언덕에 있고.”

“뭐?”

온몸의 피가 다 땅 속으로 새어 나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언덕 주변에 글자들이 춤추듯 날아다니던데? 글쟁이인가 봐. 린이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봐. 만날 우리한테는 화만 내더니.”

글자, 글쟁이... 그 녀석이다. 뿔테 안경 낀 루.

“아니, 그 녀석이 왜 린과 함께 있는 거야? 린한테 개수작 부리고 있는 거 아니야? 린이 걔 진짜 웃긴 애네. 어떻게 며칠새 마음이 바뀌어?”

“준, 왜 그래? 린은 하루에도 3번은 마음이 바뀌는 애야. 몰라서 그래? 하하.”

필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접시를 후다닥 치웠다.

“가자!”

“어딜? 아직 안 먹었는데 왜 치워?”

“린이 구하러 가야지.”

“걔를 왜 구해? 그 남자 이상해? 얼굴은 착하게 생겼던데.”

“어. 아주 이상한 놈이야. 무슨 말로 린을 유혹할지 알 수 없다고! 우린 친구잖아. 친구가 위험에 빠졌으면 구하러 가야지.”

필은 친구라는 말에 벌떡 일어났다. 필과 나는 곧장 언덕을 향해 달렸다. 나는 이제 린이 하자고 하는 대로 무조건 다할 것이다. 사귀자면 사귀고 친구로 지내자고 하면 친구로 지낼 것이다. 사실은 나도 너를 좋아해라는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린이 있는 곳이 가까워지자 언덕 위에서 흘러내린 듯한 글자들이 풀밭과 개울 사이에 가득했다. 나는 처음 본 광경에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걸음을 걸었다. 풀을 밟을 때마다 아름다운 시가 들려왔다. 필도 신기한지 여기저기 마구 밟아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음악소리와 함께 감미로운 사랑 시가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빠 음악이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뻔질나게 들락거리더니 아빠 음악까지 훔쳐간 거야? 린을 유혹하려고? 나쁜 놈! 언덕 위에 오르자 우리가 앉았던 그곳에 그 녀석과 린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을 발견한 나는 더 이상 린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왜? 나쁜 놈이라며. 린한테 말해 줘야지.”

필은 내 팔을 잡으며 재촉했다.

“아닐 수도... 있어.”

화사한 햇살처럼 빛나게 웃고 있는 린을 본 순간 나는 더 이상 다가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풀밭에는 온통 위로와 사랑의 언어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진심이라는 것을 나는 바로 알았다. 긴 시간 수많은 소리와 감정들을 수집해 온 내가 그것을 구분 못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아빠는 원래 손님이 올 때마다 음악이 든 유리병을 자주 선물한다. 그것도 내가 모를 리가 없다. 나는 의아해하는 필을 그대로 남겨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눈물이 가득 고여 있던 린의 얼굴과 지금 언덕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린이 번갈아 떠올랐다. 루는 내가 해줄 수 없었던 많은 말들을 린에게 해주고 있었다. 따뜻한 위로, 격려, 그리고 사랑. 믿기지 않는 일이 며칠 만에 모두 일어났다. 그래, 잘됐어. 누구라도 린을 위로해 주면 되지. 나는 어차피 자격이 없으니까. 그래도 어떻게 며칠 만에 그렇게 마음이 변하니? 날 좋아한 건 맞는 거야? 나는 당장이라도 린에게 달려가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에게 주었던 상처가 그대로 나에게 와서 박혔다. 괜찮아, 친구였을 뿐이야. 린이 내내 힘든 것보다는 저렇게 다시 웃을 수 있는 게 훨씬 더 나은 일이야. 나는 또다시 가슴에 뻐근한 통증을 느끼며 아빠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불을 켜지 않았지만 항아리에 연결된 관에서 나온 은은한 빛들이 어두운 공간을 부드럽게 채우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 항아리의 뚜껑을 열었다.

‘너에게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온 걸 알아. 내가 너무 늦었다는 것도. 넌 나의 사랑이고 벌이야. 용기 없던 나에게. 네 눈물 몰랐던 나에게. 내 심장은 너를 향해 뛰고 멈출 수 없다는 걸 알아. 이 심장을 가지고 너 없는 하루를 어떻게 견디라는 거야. 모든 숨마다 네가 새어 나와.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널 사랑한 만큼만 아프다 돌아설게.’

“엉엉엉엉”

나는 그 자리에 앉아 그만 울어버렸다. 항아리에서는 슬픔과 후회, 그리고 그리움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그래서 그래. 그래서 내가 우는 거야. 뚜껑만 덮어버리면 괜찮아.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뚜껑을 덮지 못했다. 저녁때가 다 되어 나는 작업실을 나왔다. 얼굴이 퉁퉁 부어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밖에서 돌아오신 아빠가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별일 아니에요. 아빠가 만들고 있는 노래가 너무 슬퍼서.”

나는 아빠를 보자 또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

“저 눈 많이 부었죠?”

아빠는 말없이 나를 안았고 나는 그 품에서 또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아빠가 이유를 묻지 않아 감사했다. 부어서 불편해진 눈을 찬물로 씻으러 화장실에 간 나는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 푸른 눈동자 주변으로 갈색빛이 희미하게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보자 나는 또 눈물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우리 준이 이제 다 컸네. 사랑도 알게 되고.”

“아니에요. 그냥 저는 아빠 음악이 슬퍼서. 엉엉엉.”

나는 린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내 마음에 사랑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도 부끄러웠다.

“음악공작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야. 사랑을 모르고서는 어떤 음악도 만들 수 없거든.”

“근데 이제 다 끝났어요. 아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요. 한 사람을 잃었을 뿐인데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아요.”

“아픈 사랑은 예술을 남기지. 이번 노래는 준이가 완성해 볼까?”

아빠는 내가 조금 진정이 되자 나를 데리고 작업실로 다시 들어갔다. 나는 아빠의 도움을 받아 항아리에 큰 숨을 불어넣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린이 떠올랐다. 바보 같은 나 때문에 상처받은 린을 생각할수록 가슴이 저려왔다. 그리고 이제 멀어진 린을 생각하니 또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조여 오는 심장을 훑고 나오는 숨을 항아리 속으로 계속 불어넣었다. 나의 숨이 항아리 속에서 맴돌다 관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숨이 관 끝까지 닿자 악기들이 아름다운 화음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새로 연결한 마이크를 통해 루가 쓴 가사들이 노래가 되어 흘러나왔다. 이제는 그녀에게 들려줄 수 없는 나의 첫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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