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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summer Nov 09. 2020

‘나의’ 할머니 이야기

친정과 시댁의 차이

There’s something special our grandmothers give us.(사진© Shutterstock.com)

친정과 시댁의 차이는 사람마다 가지각색이고 무수히 많겠지만, 그중 하나.


딸아이를 출산하고, 한창 병문안을 받고 있을 때였다.

친정이 멀기도 하고, 가장 오고 싶었을 나의 할머니는 병들고 늙은 당신이 나를 찾아오는 건 민폐이고 새로 태어난 생명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실 거라며 증손녀를 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셨기에 나를 찾아 온건 주로 시부모님과 시댁 쪽 친척분들이었다.


나중에 전해 들었지만 할머니는, 이틀이나 입원했는데 손녀딸의 출산 소식이 없어 내내 발을 동동 구르셨다고 했다. 남들은 알 까듯이 쑹풍! 하고 잘만 낳는데 당신의 손녀는 힘들어한다고.


그리고 드디어 에바가 태어났을 때 첫마디가,


 아이고, 가 괜찮다나?

                                                            (=여름이 괜찮았대?)


이틀간의 진통 후 제왕절개의 후 고통으로 밤낮으로 눈물을 쏟고 있던 때라 그때는 그 말이 주는 묵직함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가족과 너의 가족의 차이라는 것도 몰랐다.

내 가족 네 가족이 어딨냐고 하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그게 나쁜 것도 아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게 당연한 것처럼, 내 자식에게 먼저 마음이 쓰이는 게 당연지사일 테니.


시댁 어른들로부터 에바 예쁘다, 똘똘하게 생겼더라, 울음소리가 우렁차더라, 자연분만이었으면 좋았을텐데 고생했다며 선물이나 용돈 같은 것을 받기도 했지만 나의 할머닌 손녀가 고생 끝에 딸을 낳았다는 소식에 내 걱정부터 하셨다는 말이 나는 너무나 가슴이 저몄다. 그렇게 입원실에서 할머니와 영상통화를 하려는데 여보세요 보다 먼저 나와 내 눈물을 쏙 뺏던 할머니의 첫마디.


마이 아프나?


나에게는 할머니가 그런 존재였다. 친정엄마가 있었으면 친정엄마가 이렇게 내 걱정을 먼저 해주셨겠지. 친정엄마의 존재란, 이런 느낌이었을 것 같다. 남편을 만나 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지만,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왠지 내 평생 딱 한 번만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내 편. 오로지 내 걱정에 아낌없이 퍼주되 한사코 돌려받기를 거부하는 그 단 하나의 내편의 여생이 가늘고 희미해져 간다는 사실이 슬펐다. 항상 잔소리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왜 몰랐을까. 죽음을 충분히 많이 경험해놓고도, 왜 그 존재의 소중함을 자꾸만 놓치고 살았을까. 할머니는 언제부터 나를 일순위로 생각하셨을까. 나의 일순위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었는데.


 후로도 할머니는 나와 통화할 때마다 신생아인 증손녀에게 아직도 마무리 인사는  이렇게 하신다.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자고~ 엄마 애먹이지 말거라





단순 감기에도 어제오늘 오른 열에 아픈 것이 서러워 문득 할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조금만 울먹여도 당신의 마음이 어떨까 싶어 결국 전화하지 못했다. 남편이 에바를 데리고 당신의 아버지와 깨가 쏟아지는 화상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분이 묘했다. 항상 딸같은 며느리라는 표현에 소화가 안되는  느꼈었는데 시댁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내게 보내시는 '당신의 손주는  크고 있냐' 안부 메세지에, 마치 하우알유-아임파인 땡큐 앤유 라고 할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의 가족과 나의 사이는 답이 정해져 있는 관계같았다.

결국 그 통화에 동참하기 위해 무거운 몸과 마음을 이끌고 한 껏 웃으며 안부인사를 전하고 에바의 재롱을 이끌어내던 나는, 딸'같은' 며느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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