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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밤이야

by 여름햇살


아름다운 밤이야

보홀 시내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길을 모르겠다고 했다. 내가 아는 남편은 아무리 낯선 곳에서도 척척 길을 찾는 사람이라 순간 당황스러웠다. '남편, 나이 들어 감이 좀 떨어지나?' 길치인 내가 차를 타고 오가며 본 익숙한 방향을 가리키자 남편이 아닌 것 같다며 다른 길로 갔고 나 역시 자신이 없어 남편을 따라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양쪽 길 다 호텔로 통하는 길이었다. 우리가 선택한 길은 더 멀지만 대신 볼거리가 많은 길이었다. 잡화점을 기웃거리고 맛있어 보이는 간식들을 보며 부른 배를 아쉬워하면서 북적북적한 거리를 걸었다.


걷다 보니 알로나 해변이 나왔다. 해변을 따라 테라스펍들이 쭈욱 늘어서 있는 모습에 절로 신이 났다. 나는 테라스펍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어떻게 거기에 앉아 맥주를 마셔볼까 하며 기회를 노린다. 시내의 펍에서는 용기가 없어 못 들어갔는데 해변에 이렇게 멋진 펍들이 있으니 횡재한 기분이었다. 마사지받으라고 호객하는 이들도 있고, 해물을 내놓고 파는 펍도 있고 색색의 조명을 자랑하며 음악을 연주하는 가게도 있었다. 가이드가 해변에서 냉장고도 없이 보관하는 해물을 먹고 탈 날 수도 있다며 주의하라고 말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불에 구운 그 해물들은 발길을 멈추게 할 정도로 정말 맛있어 보였다.


하나둘 펍을 지나칠 때마다 아쉬웠는데 해변길은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와 이어져 있었고, 바로 옆 호텔에 멋진 테라스펍이 있었다. 참을 수 없어 남편을 끌었다. “맥주 한 잔 마시고 가자. 넌 망고주스 마셔.” 호텔 맥주가 우리 돈으로 오천 원이 안되니 가성비도 좋았다. 맥주와 감자튀김에 망고 음료를 시켰다. 친절한 현지 직원이 감자튀김은 삼십 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필리핀은 뭐든 느린 나라니까 괜찮았다. 아마도 우리가 급하기로 유명한 한국 사람이라 미리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를 한 모금 삼켰다. 기다리는 시간마저 여유롭고 좋았다. 남편도 망고음료가 맛있다며 좋아했다. 감자튀김을 맛있게 먹고는 부족해서 더 시키며 “또 삼십 분?” 하고 물었더니 그 직원이 웃으며 “또 삼십 분”하고 답했다. 삼십 분 또 기다려 감자튀김과 맥주를 마셨다. 낮에 괜히 해양레저를 따라갔다가 고생했던 노고가 한 번에 풀리는 것 같았다.


뒷날은 반딧불투어를 다녀오니 시간도 늦고 지쳤지만 각자의 목적으로 또 해안가를 지나 거리로 나갔다. 남편은 전날 지나친 거리의 잡화점에서 뭐라도 소비할 생각이었고 나는 돌아오는 길에 호텔 테라스 펍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낭만을 즐길 생각이었다. 목적대로 남편의 손엔 허접한 비닐봉지가 들렸고 우리는 또 호텔 테라스 펍에 앉았다. 전날 그 직원이 왔다. 익숙하게 맥주와 망고 주스와 감자튀김을 시켰는데 생글생글 웃으며 친절했던 직원이 이날은 무뚝뚝했다. 필리핀사람들은 아주 친절한 편인데 말이다. 지쳤구나. 많이 늦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일하게 하는 손님이 짜증 났을까? 어쨌든 나는 맥주를 더 시키며 밤의 해변을 즐겼고 그 직원은 또 잔뜩 불은 표정으로 주문을 받았다. 이 날은 두 번째 감자튀김은 안된다고 해서 못 먹었는데 시간이 늦은 탓이었겠지만 이상하게 그 직원의 기분과 연결이 되어 마음 쓰였다.


그에게는 우리가 수많은 손님 중 하나였을 뿐인데 나도 모르게 전날의 친근함을 기대하고 있었다. 내가 보낸 기분 좋은 시간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한 번 더 하게 된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 호텔의 테라스펍 덕에 나는 현지의 바닷가에서 정말 만족스러운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밤의 해변, 남편은 망설이다가 체험한 해양레저, 보홀에서의 경험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기억에 남았지만 그 모든 순간은 하나로 이어진 소중한 여행의 추억이 되었다. 아름다운 알로나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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