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악산 둘레길
가파도를 못 간 건 어쩌면 행운이었다. 지인의 인스타에서 본 소라구이에 마음을 빼앗겨 급히 일정을 짰지만, 배편이 없어 발길을 돌리던 중 송악산이 눈에 들어왔다. “둘레길 걸을까?” 당연히 ‘덥다’, ‘불편하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얌전히 차를 세우는 남편. ‘어라, 웬일?’ 약간 의아하면서도 오랜만에 송악산에 가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이 주로 내려오는 방향으로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가축들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만든 울타리를 지나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걸었다. 내려오던 외국인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이제 오르니? 난 다 왔는데.’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도 마주 웃었다. 오랜만에 숲길을 걸으며 맘껏 자연을 느꼈다.
조금 더 오르니 아주머니 관광객 한 분이 힘든 표정으로 물었다. “다 내려가려면 얼마나 남았어요?” 많이 안 걸은 것 같아 “다 왔어요.” 했더니 남편이 구체적으로 “10분 정도 더 가면 돼요.”라고 말했다. 안도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나도 오름을 오를 때 내려오는 사람이 있으면 부럽기도 하고 힘들기도 해서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묻게 된다. 보통은 “다 왔어요. 조금만 힘내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오는데 한참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경우가 많다. “빨리, 빨리.” 남편이 깝죽거렸다. “싫어, 천천히 갈 거야.” 오르막이라 힘들었다. “빨리 걸어야 운동이 되지.” “난 운동 안 하고 산책할 거라고. 먼저 가서 기다리던가.” 계단이 여러 번 나왔다. 멀리 보이는 마을의 낮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정겹게 보였다. 예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다. 제주의 구옥들이 높은 건물들로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시골집들도 제주의 자연과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산책이었지만 오르는 계단에서 조금 숨이 찼다. 전망대에 벤치가 있어 이제 다 왔나 싶으면 내려가다 다시 오르막이 나타났다. 내려가는 계단에서 보는 바다는 아찔하도록 아름답게 반짝였다. 이제 막 씨를 뚫고 나온 듯한 애기 소나무도 보이고, 갯무꽃도 한 번씩 보여 지루하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도, 층층이 세월을 보여주는 지층 절벽도, 오래전에 다녔을 듯한 돌계단도 보였다. 남편의 뒤를 쫄랑거리며 따라가다 보니 아빠랑 소풍 나온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남편 옆에 있으면 괜히 든든하다.
전망대를 지나면 그냥 지나치기 힘든 해산물 가게가 나온다. 예전에 그곳에서 해물라면이랑 파전을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 사람들이 야외 테이블에서 소주며 막걸리를 해산물과 함께 먹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뿔소라회 한 접시를 시켰다. 뿔소라회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소라구이가 먹고 싶어 출발한 나들이지만 뿔소라회라도 먹으니 좋은걸.’ 남의 입술로 가는 소주잔을 부러운 눈으로 보며 딱 한 잔만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아줌마가 술은 안 마시겠냐며 굳이 ‘맥주, 소주, 막걸리’를 읊어서 눈앞에 그것들이 아른거려 맥주를 시켰다.
하늘은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맥주는 시원하고, 뿔소라는 싱싱하고, 함께 나온 미역은 꼬들꼬들 맛있고, 서비스 야채전도 달큰하니 맛나고 좋은 것 투성이었다. 맥주까지 마시고 나니 기분이 좋아져 말도 많이 하며 산을 내려왔다. 가파도는 못 갔지만 덕분에 마주한 송악산에서의 하루는 뜻밖의 선물처럼 나에게 행복을 주었다. ‘인생 자주 웃는 놈이 좋은 놈’이라는데, 이렇게 자주 웃을 수 있는 삶이라니, 난 참 좋은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