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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독 바다청년 Dec 05. 2021

독일 도시 답사기: 베를린

베를린 여행기

꼭두새벽부터 일어나니 군대 시절이 떠오른다. 출발한 지 7시간 만에 독일의 심장, 베를린에 도착했다. 바이에른을 지나 북부까지 오니 창밖으로만 봐도 느낌이 다르긴 다르다.

다사다난한 독일의 근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던 곳. 최초로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의 수도이자, 분단의 중심이었고, 지금은 통일의 상징이 되어 자유와 평화의 상징이자 최근엔 힙한 곳이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언제 가겠거니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가보게 된다. 독일 역사를 알고 나서부터 제일 흥미롭게 가보고 싶던 곳이다.

각 건축물에 있는 역사가 너무나도 다채로워서 흥미롭다.

국회의사당. Reichstag.

1871년 최초의 통일 이후, 건축되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이곳에서 공화제가 선포되었고, 1933년엔 한 공산당원에 의해 방화되었는데 나치는 이 사건을 계기로 권력을 잡게 된다. 전쟁 이후 서독에 위치했으나, 바로 옆에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면서 냉전의 최전선으로 상징성을 띠게 됐다. 재통일 후 통독의 첫 연방의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처럼 20세기 독일의 파란만장한 역사의 중심이었고, 지금은 독일을 이끌어가는 곳이다. 국회의사당 앞 정원에 돌로 글씨가 새겨져있는데, 뭔가 했더니 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수용소였던 곳이다. 아우슈비츠, 다하우 등. 이렇게 철저하게 반성하고 기억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Brandenburger Tor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이기고, 이 문을 개선문으로 사용하고, 저 사두마차 상을 파리에 가져갔다가, 나폴레옹 패망 이후 프로이센이 다시 저 사두마차상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평화의 상징이던 것을 승리의 상징으로 바꿨다. 1871년 보불전쟁을 승리 후, 이곳에서 개선 행진을 하기도 했다. 분단 이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을 통해 사람들은 통행했고, 통독 이후엔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문으로, 베를린 하면 떠오르는 제일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Ministergärten. Holocaust Memorial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고, 각 지방정부 관청을 이곳에 모아놓았는데, 이를 나치가 정권을 잡았을 당시, 남는 공간을 나치 정부의 관청 및 히틀러의 지하 벙커로 이용했다. 그곳은 역시 전쟁 당시 파괴되었고, 서독과 동독의 경계. Death strip라고 하여 관리되지 않고 있다가, 통일 이후 몇몇 사람들의 제안을 통해 추모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들을 탄압했던 지도자가 있었던 곳을 다시 그들을 위한 장소로 탈바꿈하는 것. 베를린의 그런 역사가 그 어떤 나라의 수도보다도 매력 있게 느껴졌다. 바로 옆엔 지금도 각 지방정부의 관청이 위치한다.


Humboldt-Universität zu Berlin

또 베를린에는 두 개의 유명한 종합대학이 있는데, 하나는 훔볼트 대학, 또 하나는 자유대학. 훔볼트대는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다. 대학 소재지가 소련군 점령지역이었던 탓에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대학 관계자들이 48년 서베를린에 세운 대학이 자유 대학이다. 훔볼트 대학의 건물은 아주 인상적이다.

Museuminsel. 그야말로 박물관 섬이다. 많은 박물관 중에 회화가 많은 Alte Nationalgalerie에 갔다. 여러 조각부터, 인상주의 작품까지. 아주 좋은 전시였다. 마네와 모네, 박물관 내부 구조 및 창문을 통해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인상적이다. 오르세 안 부럽다.


프리드리히 대왕. 훔볼트. 헬름홀츠. 아인슈타인. 훔볼트. 막스플랑크. 한나 아렌트.

곳곳에 이들의 동상과 거리에서 이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이 중 막스 플랑크의 이야기는 극적이다.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재직 당시 아인슈타인에게 베를린의 교수로 초청하고, 좋은 관계로 발전한다. 막스 플랑크는 본인도 물론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천재였지만,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브레인 모임의 주최자이기도 했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나치 정부의 반유대 정책에 위협을 느껴 미국으로 망명한다. 반면 막스 플랑크는 1차 대전은 물론이고, ‘인내하고 계속 일하라’는 그의 슬로건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나치 정권에 협조적이었는데, 반유대 정책으로 많은 친구를 잃게 되자 이에 저항하게 된다. 심지어 본인의 아들은 히틀러 암살 시도에 가담한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것이 고령의 나이에도 건강했던 그가 유명을 달리하게 된 큰 이유였다고 한다.


시내 곳곳의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있다. 주마다 다른 정부가 있고, 주정부에 많은 권한이 부여된 탓에 내가 사는 바이에른과 베를린의 분위기 차이는 제법 있다. 물론 베를린 규정이 조금 더 느슨한 편. 독일의 코로나 확산세가 심각한 편이고, 옆나라 오스트리아는 아예 봉쇄 조치가 취해졌기에 이도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것을 보는 데 있어 큰 제약이 없어 좋다.

흔히들 베를린이 힙의 성지라고 여러 친구들이 핫플을 소개해줬는데, 이는 다음 기회로 밀어두도록 한다. 기차로 최소 6시간인지라, 마음 먹고 와야되는 곳이지만, 이렇게 멋진 곳에 좋은 형, 누나가 있으니 종종 오게 될 듯하다. TU Berlin에 가고 싶은 생각도 생겼다. 살다 보면 살진 않더라도 여행뿐만 아니라 가게 될 기회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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