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내가 501 열람실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친구가 그 열람실에 있다고 해서 갔던게 아닌가 추측만 해 볼 뿐.
처음 501 열람실 문을 열었을때 입이 절로 벌어졌다.
열람실의 세 면은 모두 유리창으로 되어있었는데, 그 유리창 너머로 연둣빛과 초록빛으로 온 몸을 물들인 키 큰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햇볕을 머금은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열람실이라니!'
나는 창밖의 풍경에 반해버렸고, 그날부터 졸업하는 날까지 501 열람실의 붙박이가 되었다.
501 열람실은 다른 열람실들의 몇 배는 될 정도로 컸다. 몇 명이나 들어갈 수 있었을까. 숫자에 대한 감각이 떨어져서 정확히 헤아릴 순 없으나 백여명 이상은 들어가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칸막이가 있는 작은 열람실에서 공부할 때보다, 이렇게 사방이 훤히 트이고 많은 사람이 있는 열린 열람실은 집중이 훨씬 잘 되었다.
날마다 같은 열람실에서 공부하다보니, 붙박이로 있는 사람과 뜨내기들(?)이 금세 파악이 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와서 자리만 맞춰두고 하루 종일 사라졌다가 저녁 먹기 전에 나타나 가방을 꾸려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7~8시에 와서 11시까지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이기에 아는 척은 하지않았지만 어쩌다 학교 밖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아는 사람인줄 알고 나도 모르게 인사할 뻔한 적도 있다.
어쨌거나, 삼면이 유리로 되어있는 그 열람실에서 이른 아침의 청량한 풍경부터, 해가 지는 풍경. 그리고 밤이 깊어가는 풍경까지 모두 볼 수 있는 건, 공부하며 누리는 유일한 호사(?)였다.
그러던 어느날.
점심을 먹고 내 자리에 와서 앉았는데, 책상 위에 웬 포스트 잇 뭉치가 놓여있었다.
'이건 뭐지?'
메모가 적혀있는 것 같아, 누군가 실수로 잘못 둔 건가 싶었다.
누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나 싶어 메모를 읽어나갔다.
세월이 흘러 그 메모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자세하게는 생각나지 않는다. 두툼하게 여겨질 만큼 여러장의 포스트 잇에 뭐라고 뭐라고 많이도 썼는데..
어쨌거나 요는 이랬다.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멋있습니다.
~(칭찬 남발)~
처음 몇 장의 포스트잇에는 나에 대한 칭찬이 글들이라 나름 기분 좋게(?!) 읽어내려갔는데, 사실 그 메모를 읽어나가면서도 어디선가 이 메모를 쓴 사람이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왜냐? 나는 그사람이 누군지 1도 몰랐기 때문이다.)
자신이 놓아둔 메모를 읽는 나를 관찰하면서 그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치 내가 누군가의 감시라도 받고 있는 양 찝찝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긴 했기에 끝까지 메모를 읽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문구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표정을 찌푸리고 말았다.
저와 한번만 만나주실 의향이 있으시면 책상 위의 책을 오른쪽으로 올려주시고, 그렇지 않으시면 왼쪽으로 올려주세요.
'아-. 놔-. 뭐라는 거야.'
나를 어디에선가 계속 관찰해온(?) 사람이 자신에 대한 정보는 주지도 않고, 대뜸 만날 의향이 있냐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줄 알고, 누군줄 알고 만나겠는가.
근데, 나더라 책을 이렇게 놓아라 저렇게 놓아라 하는 건 또 뭔가. 내가 이 쪽지를 보낸 사람에게 그런 의사표시까지 해야만 하는 건가. 이런 생각에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근데, 지금 생각하니 그게 짜증이 나는 것이 일반적인 여자들의 반응인지, 아니면 내가 흔히들 말하는 갬성(?)이 없었던 것인지 지금 와 생각해보니 좀 궁금하긴 하다.
어쨌거나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쪽지를 다 읽자마자 가차없이(어쩌면 보란듯이) 내 앞에 있던 책들을 모두 쓸어 모아 왼쪽으로 옮겼다.
그리고선 오전에 공부하며 필기했던 노트를 다시 펼쳤다.
막 노트를 읽어보려 하는데, 왼쪽 대각선 방향 저 멀리에서 모자를 쓴 남학생이 갑자기 책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느라 부산한 소리를 내더니 가방을 메고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정신없이 열람실을 나갔다.
내 느낌이 맞았다면 아마도 쪽지를 준 남학생이었을 것이다.
황급히 가방을 싸서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남학생의 뒷모습을 보며, 방금 전까지 혼자 마음속으로 구시렁거리던 것도 잊은채 잠시. 미안해지고 말았다.
쪽지의 마지막 장을 읽는 내 표정과, 책을 옮길 때의 귀찮아하는 모습을 모두 봤을 텐데.
내 반응을 확인하자마자 저렇게 뛰쳐(?) 나가는 걸 보면(게다가 모자까지 쓰고) 소심하거나 부끄럼이 많은 사람인 것 같은데, 딴에는 어쩌면 큰 용기를 낸 일이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크게 싫은 티를 낸 건가 싶어 가슴이 뜨끔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면 자신을 밝힐 용기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며, 왼편에 쌓아두었던 책들 사이에서 공부할 책을 다시 꺼내 펼쳤다.
내게는 어제 봤지만 또 봐야 하고, 내것인 것 같지만 아직 온전히 내것이지 않은 전공 지식들을 내것으로 만들기에도 바쁜 나날들이었다.
다시
공부는 시작되었다.
열람실의 추억 ②편,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