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에는 한 달에 한 번씩 내야 하는 ‘육성회비’라는 것이 있었다. 금액은 생활형편에 따라 약간의 차등이 있었다. 거주하는 곳이 내 집인지 셋방인지, 방이 몇 개인지, 텔레비전이나 전화가 있는지 등을 ‘가정환경조사’라는 이름으로 학년 초에 했다. 그것을 근거로 금액이 정해지는 것인지, 조사된 아버지의 직업을 기준으로 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육성회비 봉투는 일반적인 박스처럼 누런색으로 보통 편지봉투보다 크고 두꺼웠고, 겉면에 매달 돈을 내면 도장을 찍는 칸이 인쇄되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그 봉투를 나누어 주었고, 그 안에 돈을 넣어 다음날 아침 선생님께 내기도 하고 반장이 걷기도 했다. 1년 치를 한꺼번에 다 내거나 6개월, 또는 3개월치를 한 번에 내는 아이들도 제법 있었다. 70년대 초반이었고 월 3백 원 정도의 금액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그것을 일찍 낸 기억이 없다. 아버지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고 고정수입이 없던 우리 집은 가난했던 까닭이다. 봉투를 나누어주고 며칠이 지나면 그때까지 안 낸 사람 이름을 반장을 시켜 칠판의 한 구석에 적게 했다. 내 이름은 늘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
어떤 선생님은 손바닥을 때리기도 했고 안 낸 아이들을 한 사람씩 불러, 안 가지고 온 이유가 무엇인지 언제까지 가져올 수 있는지 물었다. 약속된 날짜에도 가져오지 않으면 수업 중에 가져오라며 집으로 돌려보내지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수업 중간에 다른 아이들은 공부하는 텅 빈 운동장을 걸어서 몇 번이나 집에 갔었다. 돈이 없는 것을 알고 있어, 집에 가도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내가 온 이유를 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숨바꼭질하듯 학교 근처를 빙빙 돌며 시간을 보내다가 수업이 끝난 시간에 텅 빈 교실 내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책가방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배짱이라는 것이 없어서 그런 다음날이면 학교 가는 것이 싫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선생님께 갖다 드리라며 편지를 써 주었다. 편지에는 우리 집 형편이 어려우니 며칠 내로 융통해서 보내겠다는 구차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 내용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을 선생님께 갖다 드리지 않고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편지를 읽어보신 선생님이 '네 아버지 뭐하시냐?'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짧은 말투 안에 자식의 육성회 비조차 제 때에 내주지 못하는 우리 아버지에 대한 한심함이 묻어있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이라 교탁 앞에 서 있던 나에게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질문을 하면서 읽은 편지를 교탁 한쪽으로 휙 던지던 선생님의 표정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렸지만 나와 아버지가 함께 무시당하는 모욕적인 기분이었다. 그 후로 나는 아버지 편지를 선생님께 전달하지 않았고 그냥 불려 나가서 혼나는 편을 택하곤 했다. 우리 아버지는 글씨를 잘 썼다. 편지를 집어던진 선생님도 '네 아버지가 직접 쓴 글씨냐?'라고 물었었다.
삼 남매 중 내 육성회비가 가장 늦었던 것을 나중에 알았다. 나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철저히'외톨이'였다. 아버지 말고는 오빠나 동생 누구도 내게 먼저 말 걸지 않았다.
엄마는 나를 '더럽고 징그러운 벌레'처럼 대했다.
나는 결혼한 후에 아버지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어려서부터 너에게 잘해준 것 없이 지금까지 신세만 져서 미안하다는 내용으로 가득했던 아버지의 편지는 세 장이나 되는 장문이었다. 그 긴 편지는 지금 없다. 어린 시절 엄마의 지긋지긋한 잔소리 원인이 아버지가 무능한 탓이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아직까지 이런 편지나 쓰고 있는 아버지에게 짜증스럽고 화가 났다. 그렇게 아버지의 편지는 쓰레기통 속으로 버려졌다.
가끔, 내 경솔한 행동을 후회하면서, 아버지의 잘생긴 글씨 가득한 편지가 그리운 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