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철학#6
몇 주 전, 평소 아끼는 한국의 친구로부터 슬픈 소식이 왔다. 결혼 한지 아직 2년이 채 안된 어여쁜 딸아이를 둔 부부였는데, 갑작스럽게 남편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비보였다. 아직 서른 초반밖에 안된 젊고 건강한 남성이 과호흡 증상으로 죽었다는 사인이 믿기지 않았는데, 눈앞에서 경험한 친구의 충격은 어떨까. 나는 친구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사연을 듣게 되었다. 남편은 출산 후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아내의 몫까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조금 더 보수가 좋은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건설업을 하는 회사였기에 잦은 회식에 시달리기도 했고, 신생 부서라는 명목으로 직원 두 명이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과업무 탓에 스트레스가 심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원치 않는 술을 강요당하는 상태였다. 남편은 술을 잘 먹지 못하는 체질인데, 상사의 압박과 사회생활의 눈치로 인하여 어쩔 수없이 기본 소주 5병 이상의 과음을 주 3회 정도 지속하는 회사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날도 회식 이후 새벽 2시가 넘어 만취가 되어 들어온 남편은 갑작스러운 과호흡 증상으로 곧 사망했다고 한다.
나는 이 사연을 듣고, 처음에는 남겨진 내친구와 어린 딸아이가 눈에 아른거려 마음의 고통이 밀려왔다. 이 고통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목놓아 우는 그녀의 목소리를 그저 듣고만 있었다. 성실하고 착하기만 한 남편에게 더 잘해주지 못했던 시간들을 돌아보며 후회와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고통이 얼마큼의 크기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울고 있는 친구 앞에서 그저 함께 울어줄 엄두도 나지 않아서, 친구의 고통을 객관화하기 위해 노력해보았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희생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기업문화에 분노했고, 법정 한부모 자격요건으로 인한 차상위계층의 소외의 현실에 대해 비판했다 (법정 한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2인 가구 소득기준 150 만원 이하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일단 남겨진 두 사람의 생활을 위해 산업재해 보상을 받는 게 우선이라 생각해서, 마지막 회식장소의 CCTV 확보와 건강상태를 증명하는 증서를 발급받아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아는 변호사를 친구에게 연결해주었고, 최대한 증거자료들을 모아야 한다는 어설픈 말들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의 죄책감을 덜려고 했다. 일단 현실적인 대책을 세워보자는 나의 행위는, 갑자기 마주한 이별을 경험한 그녀와 함께 울어줄 용기가 나지 않은 나를 숨기기 위한 행위였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무거운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위선적인 조언들이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객관화라는 것은 어쩌면 대상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거리를 두겠다는 행위라는 말에 동의가 되었다. 나는 그녀의 고통을 감히 객관화해보려고 했다.
그녀의 현실은 다음달이면 집 계약도 만료되어 이사를 해야 하는 실정이었고, 남편의 사망신고와 행정서류들을 처리하러 다니면서 당장 갓난아이와 함께 살기 위해 직장을 구해야만 했다. 내가 어설프게 그녀의 고통을 객관화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닥쳐올 혹독한 고통의 현실들을 해쳐나가야만 한다. 그녀의 고통 앞에서 나는 여전히 ‘나 자신’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상태 그 자체에 주목하지 못하고, 좋은 친구가 되고픈 (혹은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상대의 고통을 회피하고 싶은) 나의 무서운 욕망이 발견되었다. 내가 그토록 비판하던 동일성(identify) 메커니즘의 이기적인 위선과 폭력을 발견하는 자리였다.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이 주장하는 것처럼, 동일성 메커니즘을 벗어나 대상을 물화(reify) 하지 않고, 대상의 사태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동일성을 반성하고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개념운동인, 아도르노가 말하는 부정변증법(negative dialectic)이 현실에서 적용 가능할까?
동일성 메커니즘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상을 계속 동일화 시킴으로 인해서, 나와 너는 같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지배의 메커니즘으로 나아간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는 인식 자체가 폭력의 지배적 구조를 생산해내는 것이다. 신학자 아퀴나스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총체성을 분리시킴으로써 희생자들이 객관화되는 구조를 사회적 죄(social sin)라고 했다. 죄를 나와 신과의 단절된 관계 상태라고 보는 아퀴나스의 관점에서 보면, 공동체적인 관계를 단절하려는 인간 본성 자체가 죄라는 것이다. 상대방을 희생자로 낙인찍고, 객관화시키는 행위 자체가 죄인 것이다. 희생자를 어떤 집단으로 카테고리화 하지 않고, 상대방의 고통 그 자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쩌면 그 고통을 객관화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대하기 어렵다고 상대방의 고통에 대해 폭력을 가하는 것은 아퀴나스의 말처럼 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 죄는 나와 대상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것이고, 지배와 단절이라는 인간의 경향성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신학적 의미의 ‘죄’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죄는 상대의 용서와 나의 철저한 회개 없이는 죄의 상태에서 해방될 수가 없음을 의미한다. 함부로 상대방의 고통을 객관화했던 나의 행위 역시도, 상대의 고통을 내 기준으로 동일시 함으로써 공동체적 관계를 가리려 했던 사회적 죄였던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수많은 인식과 판단을 통해 매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나를 비롯한 일상의 우리 삶 가운데 저지르는 사회적 죄들이 만연하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내 멋대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동일성의 잣대로 인식 행위를 하는 이상, 우리는 가리어진 사회적 죄로부터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우리 가운데 다양한 모습으로 있는 고통들을 한 가지의 틀로 박제시킴으로써 해결해버리려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돌이켜본다. 습관화된 고통 해석을 대신해서, 고통이 침묵하는 자리를 함께 하는 연습이 나이브한 고통 해결을 넘어서는 변혁적 치유이기를 기대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끼는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을 함께 한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 어렵다. 그 당연한 어려움 앞에서, 나의 가리어진 죄들의 회개를 고백해보고, 그녀가 가리어진 희망을 발견해나갈 수 있기를 응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