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묵상#6
관계에 있어서 믿음과 신뢰의 기반은 관계의 질을 결정한다. 부모 자식간이어도, 연인 간이어도, 친구 혹은 동료 간이어도, 그 어떤 형태의 관계들에도 전제되는 믿음과 신뢰는 각각의 고유한 특성들이더라도 보편적 개념으로 존재한다. 믿을 수 없는 사람하고는 관계를 더 깊이 유지할 수 없다. 믿을 수 없다는 말의 의미는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내가 믿는 것을 저 사람이 지속적으로 함께 공유하지 않음을 느낄 때 신뢰의 기반이 형성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믿는 것을 무조건 그 사람이 믿어줘야만 신뢰가 형성될 수 있는걸까? 그것도 아니다. 그사람의 고유의 믿는 것들을 내가 함께 이해하는 노력이 뒷받침되고,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방식으로 신뢰는 오히려 강화가 아니라 "생성"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뢰와 믿음은 한 가지로 고정될 수 없고, 나 위주로만 동일시 되는 것도 아니며, 다양한 형태로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된다.
성경 본문 속에서 예수에게 모세의 법을 가지고 와 이혼은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묻는 사회적 관습에 대해, 예수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신뢰의 기본은 관습이나 법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하나의 몸을 이루고자 했던 원래의 의도에 있음을 상기시켜주신다. 그렇지만 마음이 굳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원래의 마음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과 법에 기준을 두어 쉽게 신뢰를 무너뜨리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주장하려고 함을 깨닫게 해주신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기를 기준에 두어 신뢰를 형성하는 사람은 쉽게 관계를 생각하고 저버리려고 할 것이며, 신뢰의 반대는 간음adultery 행위라고 강조한다. 신뢰의 반대인 믿음을 무너뜨리는 행위는 배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단어인 간음이라는 단어를 세번이나 사용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는 아무래도 자기중심성의 매우 의도적이며 구체적인 방식인 간음이라는 개념으로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본문의 마지막에 예수를 향해 다가오는 어린아이들에게 호통치는 제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을 보며 예수는 오히려 그들을 향해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다가갈 수 없다고" 말한다. 신뢰와 관계있는 비유인 것 같은데, 어린아이와 같은 자는 어떤 상태를 의미할까? 연결된 본문들인 사무엘하와 사도행전을 읽어보니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온다. 하나는 누구든지 집으로 돌아올 수 없는 자들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고, 하나는 인간적인 마음으로 죽음을 알면서도 피해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예언자들과, 그를 거부하고 자신이 신을 사랑하고 예수를 닮고자 하는 바울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의 선택을 존중하며 마지막에 보이는 예언자 (네 딸들)들의 말 "그저 주님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격려를 보면서, 신뢰의 기본은 상대방에 대한 깊은 경청이고, 존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어린아이처럼 선입견 없이 조건없이 상대방을 향해 말걸고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내 믿음을 전하는 중요한 자세라는 것을 깨닫는다.
누구든지 자신만의 텍스트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나 스스로도 어떻게 읽고 해석하느냐에 있고,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어떻게 상대방의 텍스트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지, 그리고 참으로 이해하고 경청할 수 있는지가 신뢰를 형성하는 키가 될 것이다. 신뢰는 언제나 고정되지 않는다. 하나의 틀로만 존재하는 신뢰는 결국 고착화되고 무너지게 될 것이다.
나는 내 방식으로만 신뢰를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럼으로써 나를 향한 신뢰가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References: 2 Samuel 14:1-20 , Acts 21:1-14, Mark 1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