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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하는 돌멩이 Jun 27. 2021

형편에 맞는 헌신과 평형

하루묵상#5

2Corinthian 8:7-15

Mark 5:31-43

2Samuel1:1,17-27


Kewords: God's righteousness generative forces and dstructive poisons

Do not fear, only believe. 

각자의 형편에 맞는 헌신. 분수에 넘는 헌신은 옳지 않아. 서로를 사랑하는 일은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형을 맞추기 위함이다.

Talitha cum 소녀여 일어나라

전쟁중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형제를 죽이기를 원치 않았으나 결국 죽이고말고, 용서받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상대방에게 휴전을 먼저 제안했을 때 선뜻 먼저 휴전청함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생긴 뜻밖의 상황.



오늘 세 내러티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예상했던 일들이 뒤집어지는 상황 (혹은 기적이라 불리지만)에 필요한 결단과 용기에 대한 내용이다.

모두가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소녀였지만 예수님께서 소녀를 향해 달리다굼을 외쳤을 때 기적같이 살아난 소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놀라워하는 표정들이 상상된다. 또한 사무엘하에 나오는 전쟁중의 상황에서 서로 대치하는 가운데에서도 죽이기 앞서 적의 형제를 건들지 않고자했으나 결국 죽이고난 후에 예상되는 장기화된 전쟁의 상황을 뒤엎는 의외의 화해의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이 또한 기적같은 상황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예상을 뒤엎는 네러티브들과 고린도후서의 바울의 말인, 분수에 넘치는 헌신보다는 각자의 형편에 맞는 헌신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헌신적 사랑의 본질은 괴로움보다는 평형을 맞추는 데 향해있어야 한다는 말은 보이는 것을 뛰어넘는 우리의 용기와 결단과 관련되어 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누군가를 도와주고자 하지만 그러한 행동이 내 삶에 지장을 초래한다면 그것 역시 "sin of ommision" 죄의 누락과 관련된다고 아퀴나스는 지적한다. 나의 의를 위해 남에게 피해를 준 것은 죄 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행위 역시 상대방과 나의 평형을 위해 초점맞춰져야 한다. 만약에 헌신 자체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본인과 상대방을 괴로움으로 향하게 한다면 이는 아퀴나스의 표현에 따라 죄 인 것이다.

그렇다면, 눈 앞에 보이는 상황을 넘어설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척도는 바로 서로의 '평형'과 정의에 초점이 맞춰질 때 이다. 나의 정의 만이 아니라, 너와 나의 정의. 너와 나의 평형. 그런 점에서 헌신과 사랑은 가능 할 수 있고, 모든 현실적인 상황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기적같은 상황도 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죄를 덮기 위해 의로운 척 정당화 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내 의지의 내적 행동들 안에 악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음을 바라보게 된다. 그를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갖게 되는 것 역시 기적같은 일 일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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