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 예찬
하루 중 가장 소중한 나만의 시간.
아이들과 남편이 잠들고,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깊은 밤.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인 혼술타임-
나는 술을 사랑한다.
속이 답답한 날은 냉장고 뒷벽에 붙여 며칠을 쟁여둔 시원한 맥주를,
울적한 날엔 향긋하고 진한 와인을,
추억이 방울방울 맺히는 그리움 가득한 날엔 보드카 칵테일을
그날의 느낌과 기분에 맞춰, 옷을 골라 입듯 술을 고른다.
나는 신입생 환영회에서 막걸리를 냉면 사발로 원샷하는 사발식을 하는 대학을 나왔다.
그렇게 단련이 되어서 인지, 술이 제법 센 편이다.
젊었을 땐 배가 찢어지도록 생맥주를 마시고 또 마시고
소주를 몇 병이나 마시며 2차, 3차를 가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고 아줌마가 된 지금은 모두가 잠든 새벽 조용히 혼술을 즐긴다.
둘째 아이가 프리케이를 다니던 시절, 학교에서 머덜스 데이를 맞아 엄마에게 카드를 만들어 왔는데,
종이를 컵 모양으로 자르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적은 깜찍한 카드였다.
그런데 그림 속의 엄마는 와인병을 들고 있었고,
아이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다른 애들은 커피잔을 만들었지만, 나는 엄마가 와인을 좋아하니까 와인잔을 만들었어!"라고 말했었다.
그 일이 내겐 적잖이 충격이었는데,
내 속을 속속들이 털어놓을 만큼 맘 맞는 친구 하나 없는 타지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풀곳이라곤 혼술밖에 없었고, 그 유혹을 끊긴 어려웠다.
간혹, 남편과 함께 마실 때도 있긴 하지만,
남편은 술을 별로 즐기지 않고, 잘 마시지도 못한다.
한잔 따라놓고 깨작깨작거리다 졸려지면 잠들어 버리는 스타일이라 같이 술 마시는 재미가 없다.
술은 자고로 맘 맞는 친구들과 밤새 수다 떨며 마셔야 하는데 말이지...
이젠 나이도 들고 건강을 챙겨야 할 때이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 횟수를 정해놓고 혼술을 즐긴다.
내게 있어 '혼술'은 단순히 술을 마시는 의미가 아니라, 완벽한 나 혼자만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게 일과 육아, 혹은 남편과의 관계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일 때도 있고,
그리운 내 옛 친구들과의 추억을 곱씹는 추억 여행일 때고 있고,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몸은 40대이지만, 마음은 20대인 나 자신을 위로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랑하는 술에도 특히 내가 애정 하는 술이 있다.
흑맥주
쓰지 않은 깊은 맛, 블랙커피의 향을 지닌 흑맥주를 나는 사랑한다.
며칠을 냉장고 깊은 곳에 잘 재워둔 맥주캔은, 따는 순간 공기가 들어가며 살얼음이 생겨 슬러시로 변한다.
그런 맥주를 유리잔에 따르면
울컥울컥 나오는 살얼음이 위를 가득 덮는데, 그 첫 모금이 얼마나 환상적인지 모른다.
일 년 내내 더운 곳에 사는 나에게 살얼음 가득한 흑맥주는 천상의 음료이다.
레드 와인을 마실 때도 나는 얼음을 넣어 차게 마시는 걸 선호하는데,
너무 차가우면 향이 잘 느껴지지 않는 단점이 있기도 하지만,
얼음이 녹아가며 점점 옅어지는, 그 아름다워지는 와인의 컬러를 좋아한다.
내가 살면서 만난 가장 맛있었던 와인은,
모로 비치를 여행할 때이다.
몬터레이 여행을 마치고 LA로 내려오던 길에 즉흥적으로 하루 묵었던 작은 어촌 마을인 모로 비치
바다 말고는 딱히 볼 것도 할 것도 없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그곳의 바닷가 노천카페에서 갓 잡아온 물고기 튀김과, 구운 굴을 안주삼아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마셨던 그 화이트 와인의 맛을 잊을 수 없다.
앉은자리에서 남편과 와인 두병을 비우고 알딸딸한 기분으로 선셋을 보며 빙구웃음을 짓던 그날이 참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면,
술의 맛은 전적으로 그날의 기분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다.
아무리 비싼 최고급 와인도 때론 너무 쓰고 떫어, 뱉어 버리고 싶은 맛을 만들어 버리기도 하고,
한 병에 고작 $14에 팔던 저 와인이 세상 제일 맛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은 그날의 모로 비치를 추억하며,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따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