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도도한 무심함이 건네는 가장 커다란 자비에 대하여
계절이 한 바퀴를 돌아 기어이 경계선을 넘어왔다. 겨우내 죽은 빛으로 엎드려 있던 벌판이 일순간 들썩인다. 창을 열면 훅 끼쳐오는 것은 벚꽃의 비명 같은 화사함이다. 꽃들은 저마다 "나 여기 있노라"며 다투어 생의 비망록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 무채색의 고요가 흐르던 길거리는 이제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한 소란 속에 잠겼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밀물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굽이진 산책로에는 손을 잡은 이들과 유모차를 미는 이들이 가득하다. 그들은 가장 환한 꽃가지 아래에 멈춰 서서 렌즈 속에 생의 한 조각을 가둔다. 카메라를 향해 짓는 그들의 웃음은 꽃보다 선명하고, 그 선명함은 도리어 서글프다.
그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문득 묘한 어긋남이 고개를 든다. 저 꽃들 아래에서 누군가는 벅찬 행복을 고백하지만, 또 누군가는 그 눈부심에 눈이 멀어 자신의 짙은 그림자를 확인한다. 병실 창문에 붙어 마지막일지도 모를 낙화를 눈에 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느 시인은 이 들끓는 생명력 속에서 도무지 외면할 수 없는 생의 의지를 읽는다. 봄은 모두에게 똑같이 도착하지만, 그 봄을 받아내는 마음의 그릇은 저마다의 두께와 금 간 틈이 다르다.
나는 보도블록 틈바구니, 매연과 먼지를 뒤집어쓴 채 고개를 내민 제비꽃 한 송이 앞에 멈춰 선다. 이 가녀린 생명은 나를 위해 피었을까. 내가 이 꽃을 보며 지나온 세월의 허허로움을 곱씹든, 혹은 새로 마주한 시간의 고독을 문장으로 옮기든, 제비꽃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서늘한 진실을 마주한다. 저 꽃들과 연초록 잎들은 우리에게 철저히 무관심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꽃이 나를 위로한다고 믿으며 산다. 하지만 내가 전쟁의 포화 속에 서 있든, 혹은 홀로 남겨진 방 안에서 긴 밤을 지새우든, 저들은 오로지 제 목숨을 이어가기 위한 맹목적인 몸짓에만 충실할 뿐이다. 인간이 죽든 살든, 계절은 아무런 미안함 없이 흐르고 꽃은 제 갈 길을 간다. 마음이 비워져 있기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고, 그 치우침 없음이 저토록 평온한 풍경을 완성한다.
놀라지 마라. 자연의 이 당당한 무심함이야말로 인간에게 허락된 가장 큰 자비일지도 모른다. 꽃이 나를 위해 피지 않았기에, 나 또한 누군가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내 삶을 낭비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다. 내가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도 내년 봄의 꽃은 여전히 요란하게 피어날 것이다. 그 엄연한 사실이 거꾸로 나를 자유롭게 한다. 나의 슬픔이 커다란 우주의 눈으로 볼 때는 한 조각 낙엽보다 가볍다는 것, 그 차가운 위로가 비로소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바람에 날린 꽃잎 하나가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가 이내 바닥 위로 떨어진다. 나를 위로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저 바람의 경로에 내가 서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 무심한 닿음이 고마워 뒤돌아보지 않고 걷는다.
세상은 여전히 꽃들로 소란스럽다. 저들은 오늘도 나를 보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의 생을 뜨겁게 앓고 있을 뿐이다. 그 뜨거운 무심함 속에서, 나는 비로소 마음속에 고여 있던 말들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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