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봉(假縫) 찬가

- 봄

by 선비천사

얼어붙은 들판에
빛이 얇게 얹힌다


논바닥은 갈라져
검은 틈을 드러내고
마른 뿌리들이
잘린 실처럼 밖으로 밀려나 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계절은 올이 풀린 옷감처럼
조용히 해진다


아직 끊어지지 않은 매듭 하나
흙 속에서
미세하게 버티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 금을 더듬는다


씨앗은 둥글게 몸을 말고
껍질 안쪽에서
천천히 안을 밀어낸다


터지는 소리는 없으나
어둠 속에서는
아주 작은 파열이 이어진다


드르륵—


땅속 깊은 자리에서
실 한 가닥이 당겨진다


갈라진 결이 조금 모인다


밤새 서리가 내려
막 올라온 싹을 눌러도

흙은 놓지 않는다


잘못 꿰맨 자리 위로
다시 실이 지난다


썩은 줄기에서 스민 물기

그 냄새를 따라
새 뿌리가 방향을 튼다


얼음의 잔해를 밀고
돌의 무게를 견디며
가느다란 몸 하나
빛 쪽으로 선다


들판에 번지는 초록은
환한 색이 아니다


여러 번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진 자리
실이 겹친 두께


대지는 늘 미완의 천


오늘도

흙 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바늘이 오간다


봄은
완성되는 계절이 아니라


터진 자리마다
임시로
다시 꿰매지는 시간


드르륵—


지구가
자기 몸을
다시 입는다




*같이 보면 좋은 글

삼월의 눈, 위로 사라지다




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

작가 방철호의 블로그 방문하기

[전자책]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

이전 13화올챙이, 꼬리를 자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