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커피 한 잔의 온도[2화]

2화. 긴 머리, 밝은 원피스

by 선비천사

2화. 긴 머리, 밝은 원피스


반지하방.

문을 열자 습한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곰팡내.

아무리 환기를 해도 사라지지 않는 냄새. 벽 모서리에는 검은 얼룩이 번지고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른다. 그냥 어느 날 보니 거기 있었다.

선호는 불을 켜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방은 좁았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그게 전부. 천장은 낮아서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반지하라 창문은 지면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있었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이 보였다.

그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물 얼룩이 져 있었다. 지난 장마 때 생긴 것이다. 집주인에게 말했지만 돌아온 건 “원래 반지하가 그래요”라는 대답뿐이었다.

원래 그래요.

그 말이 싫었다. 원래 반지하가 그렇고, 원래 재수생이 그렇고, 원래 서른에 아무것도 없으면 그런 거야.

선호는 눈을 감았다.

편의점의 실루엣이 또 떠올랐다.

내일 도서관 가면 볼 수 있을까.

이상한 생각이었다. 아는 사람도 아닌데. 뭘 기대하는 거야.

선호는 고개를 저었다.

내일은 328페이지를 넘겨야지.

그 작은 다짐만이 그를 잠들게 했다.


* * *


다음 날.

도서관에는 일정한 온도가 있었다.

바깥이 영하 10도여도, 폭염이 몰아쳐도, 도서관 안은 늘 비슷했다. 선호는 그게 좋았다. 예측할 수 있다는 것. 내일도 모레도 같은 온도, 같은 조명, 같은 정적.

반지하방에는 그런 게 없었다. 여름엔 찌고, 겨울엔 얼었다. 비가 오면 습해지고, 눈이 오면 창문이 얼었다. 모든 게 불확실했다.

그래서 도서관으로 왔다.

선호는 평소처럼 창가에서 세 번째 자리에 앉았다. 가방에서 책과 필통을 꺼내고, 물병을 책상 오른쪽에 놓았다. 언제부터인가 이 루틴이 생겼다. 작은 의식처럼.

오전 아홉 시.

열람실은 아직 한산했다. 자리의 절반 정도만 채워져 있었다. 선호는 그 시간이 좋았다. 사람이 많아지면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다들 열심히 하는데 나만 못하는 것 같은.

그는 책을 펼쳤다.

328페이지.

어제의 다짐대로 한 페이지를 넘겼다. 그것만으로도 작은 성취감이 느껴졌다.

“행정행위의 철회란……”

선호는 형광펜으로 줄을 그으며 읽어 내려갔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선호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멈췄다.

긴 생머리. 밝은 원피스.

겨울인데도 얇아 보이는 카디건을 걸친 여자가 들어왔다. 손에는 책 몇 권과 텀블러를 들고 있었다.

어제 편의점에서 본 그 실루엣이었다.

선호는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왜 쳐다보는 거야.

자책하면서도 눈이 다시 그쪽으로 갔다.

그녀는 창가 반대편, 선호에게서 대각선으로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풀고 책을 꺼내는 동작이 조용했다. 마치 이 공간에 오래 있어온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선호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 *



[해주 시점]


처음 그 남자를 본 건 일주일 전이었다.

도서관에 들어서는데, 창가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해가 기울어 빛이 비스듬히 내려앉은 시간. 그 빛 아래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의 어깨가 유난히 작아 보였다.

그날따라 해주의 하루도 무거웠다.

임용시험 3수. 주변 친구들은 하나둘 취직하고, 결혼하고, 자기 삶을 살고 있었다. 해주만 제자리였다. 아니, 뒤처지는 것 같았다.

좁은 고시원 방에서 혼자 울기도 했다. 힘들어도 밖에서는 웃으려고 애썼다. 웃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서. 하지만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면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아버지는 치매로 요양병원에 계셨다. 엄마는 해주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혼자 버텨야 했으니까.

그런 날, 그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인지 비슷한 무게를 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 * *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 남자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창가에서 세 번째, 콘센트 옆자리. 노트북도 없이 두꺼운 책만 펼쳐놓고.

어느 날, 그가 전화를 받으러 나가는 걸 봤다. 복도에서 통화하는 모습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통화가 끝난 후, 그의 어깨가 더 축 처져 있었다.

저 사람도 힘든 일이 있구나.

이상하게 그 생각이 해주의 마음을 조금 가볍게 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며 각자의 싸움을 하고 있는 누군가. 그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 * *


오늘도 그 사람이 있었다.

창가에서 세 번째 자리. 매일 같은 자리에 앉는 남자. 행정법 책을 펴놓고 한 페이지도 못 넘기는 남자.

해주는 대각선 자리에 앉으며 슬쩍 그쪽을 봤다.

가끔 창밖을 바라보는 눈이 너무 쓸쓸해서, 나도 모르게 쳐다보게 됐다. 펜을 돌리다 멈추고, 한숨을 쉬다 고개를 떨구는 모습. 생각할 때 머리카락을 만지는 자기 버릇처럼, 그 남자도 펜 돌리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327페이지.

며칠째 같은 페이지에서 멈춰 있는 걸 알았다. 책상이 대각선이라 페이지 숫자까지 보이진 않았지만, 책갈피 위치가 늘 같았다.

……힘들어 보인다.

나도 힘든데. 저 사람도 힘들겠지.

해주는 가방에서 필통을 꺼내며 생각했다.

뭔가 해줄 수 있을까.

말을 걸 용기는 없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말을 건다?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게 뻔했다.

그냥 내 일이나 하자.

해주는 노트를 펼쳤다. 교사 임용시험 준비. 그녀도 자기만의 싸움이 있었다.

하지만 눈은 자꾸 그쪽으로 갔다.



*3화 이어서 보기

캔커피 한 잔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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