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커피 한 잔의 온도[1화]

1화. 은빛 캔커피

by 선비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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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은빛 캔커피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은빛 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직 차갑다는 뜻이다. 누군가 방금 올려놓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누가? 왜? 장난인가? 아니면 실수로 둔 걸까? 그도 아니면―누군가 나를 알고 있다는 뜻인가?

선호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5분. 고작 5분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뭐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분명 누군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다들 고개를 숙이고 공부 중이었다. 대각선 자리의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러웠다. 오히려 그게 수상했다. 누군가 방금 자리에서 일어났다면, 책장을 넘기는 손이 멈췄을 테고, 시선이 흔들렸을 텐데. 그런데 이 캔커피는 대체 어디서 온 걸까?

긴 생머리. 밝은 원피스.

처음 본 건 열흘 전이었다.


* * *


열흘 전―

도서관은 언제나 건조했다.

형광등 불빛이 책상 위로 차갑게 내려앉았다. 종이 냄새가 공기 속에 쌓이고,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맨 앞줄에는 늘 같은 할아버지가 신문을 읽고 있었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세상을 천천히 훑는 눈. 가끔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났다.

창가 쪽에서는 수험서를 높이 쌓아둔 청년이 연필을 돌리고 있었다. 돌리다 떨어뜨리고, 줍고, 또 돌리고. 간헐적으로 의자가 삐걱거렸다. 누군가 기침을 하면 그 소리가 천장까지 올라갔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선호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았다.

창가에서 세 번째, 콘센트가 있는 자리. 노트북을 쓰지 않아도 그 자리를 고집했다. 이유는 없었다. 아니, 있었다. 처음 이 도서관에 왔을 때 앉았던 자리라서. 그게 전부였다.

자리에 앉을 때마다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책상 왼쪽 구석에 새겨진 작은 낙서. 볼펜으로 그린 것 같은 희미한 선. 하트 모양인지, 그냥 끄적임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이 자리에 오래 앉아 있다가 남긴 흔적 같았다.

전에 누가 앉았던 걸까.

궁금했지만 알 방법은 없었다. 선호는 그냥 그 낙서 위에 손을 올려두는 버릇이 생겼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는 펜을 돌렸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펜을 끼우고 빙글빙글. 집중이 안 될 때면 늘 이러는 버릇이 있었다.

행정법 기본서 327페이지. 어제도 327페이지였고, 그제도 327페이지였다. 글자는 눈에 들어왔지만 머리에 남지 않았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처럼 겉돌았다.

집중해.

속으로 되뇌었지만 소용없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선호는 열람실을 나와 복도에서 전화를 받았다.

“선호야, 이번 달 월세는 보냈다.” “……감사합니다.” “시험이 석 달 남았다며.” “네.”

침묵이 흘렀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선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지막 기회야. 알지?”

전화가 끊겼다.

선호의 손이 떨렸다. 긴장하면 목덜미를 긁는 버릇이 있는데, 지금 손이 자꾸 목 뒤로 갔다.

석 달.

떨어지면 강화도로 돌아가야 한다. 서른에 아무것도 없이.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 아버지의 실망한 눈빛.

열람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았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 *


서른.

그 숫자가 무겁게 느껴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강화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바닷바람이 세게 부는 작은 마을. 대학에 합격했을 때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잔치를 열었다. “우리 마을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 간 게 몇 년 만이냐”며 아버지 등을 두드렸다.

그 기대가 짐이 된 줄은 몰랐다.

첫 직장은 2년을 버텼다. 버텼다는 표현이 맞았다.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눈을 감았고, 매일 저녁 지하철에서 눈을 감았다. 그러다 어느 날 사표를 썼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그리고 지금.

서른에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고등학교 때였다. 그때 어머니가 주셨던 손수건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강화도의 모래바람에 맞으며 학교 가던 날, 어머니가 그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셨다.

그 손수건은 지금 반지하방 책상 서랍 안에 있다.


* * *


저녁 일곱 시.

도서관 문을 나서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1월의 바람은 매서웠다. 선호는 패딩 지퍼를 턱까지 올리고 걸음을 옮겼다.

버스 정류장까지 10분.

그 10분이 하루 중 가장 싫은 시간이었다. 도서관에서는 적어도 ’ 공부하고 있다’는 핑계가 있었다. 하지만 이 길 위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반지하방으로 돌아가는 남자.

정류장 근처에 편의점이 있었다. 선호는 무심코 유리창을 봤다.

누군가 서 있었다.

긴 머리. 밝은 색 코트.

캔음료를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선호는 멈칫했다. 왜인지 시선이 갔다. 그 실루엣이 눈에 익었다. 어디서 봤지? 도서관에서?

여자가 움직였다. 계산대 쪽으로.

선호는 고개를 돌렸다. 괜히 쳐다본 것 같아서 민망했다.

버스가 왔다.

선호는 창가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꽂았다. 음악은 틀지 않았다. 그냥 세상과 단절되고 싶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불빛이 스쳐 지나갔다.

저 불빛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삶이겠지. 퇴근하는 사람, 약속에 나가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사람.

나는 뭘까.



*2화 이어서 보기

캔커피 한 잔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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