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은빛 캔커피 (현재)
―그리고 열흘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선호의 일과는 단순했다. 아침 아홉 시에 도서관에 가고, 점심엔 편의점 김밥을 먹고, 저녁 일곱 시에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그녀를 힐끔거린다.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서른 먹은 남자가 이름도 모르는 여자를 쳐다보면서 위로받는 다니. 말로 하면 소름 끼칠 이야기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녀가 오면 오늘도 왔구나, 싶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쓰면, 저 사람도 열심히 하는구나, 싶었다.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며 턱을 괴면, 저 사람도 힘든 날이 있구나, 싶었다.
연결되지 않는 상상.
의미 없는 감정.
그래도 그것만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 * *
그날도 평소와 같았다.
선호는 창가에서 세 번째 자리에 앉아 책을 폈다. 340페이지. 열흘 동안 13페이지를 넘겼다. 느렸지만 그래도 나아가고 있었다.
열 시쯤, 그녀가 들어왔다.
선호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가 자리에 앉는 소리를 들었다. 가방 지퍼 열리는 소리, 책 내려놓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익숙한 소리들.
선호는 작게 미소 지었다.
오늘도 왔구나.
* * *
오늘도 그 사람이 327페이지―아니, 이제 340페이지였다.
조금씩 나아가고 있구나.
해주는 안도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남자는 같은 페이지에서 멈춰 있었다. 펜을 돌리고, 창밖을 보고, 한숨을 쉬고.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나도 저런 적 있으니까.
임용시험 3수째. 처음 떨어졌을 때, 두 번째 떨어졌을 때. 그때의 막막함을 해주는 알았다.
뭔가 해주고 싶었다.
말을 걸 용기는 여전히 없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해주는 가방 안을 봤다. 아침에 사 온 캔커피가 있었다.
……이걸 줄까?
이상하려나. 모르는 사람한테 갑자기 음료를 주는 건.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상해.
하지만 그날 저녁, 반지하방 같은 좁은 고시원으로 돌아가면서 해주는 생각 했다.
내일은 용기를 내볼까.
* * *
두 시간쯤 지났을까.
선호는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물을 너무 많이 마셨다. 참으려다 결국 일어섰다.
화장실은 열람실 바깥에 있었다.
선호는 최대한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빨리 다녀오자.
자리를 오래 비우면 불안했다. 누가 가져가는 것도 아닌데, 괜히 그랬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손을 씻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대학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선호는 얼굴에 물을 튀기고 종이타월로 닦았다.
열람실로 돌아갔다.
자기 자리에 앉으려다 멈췄다.
책상 위에 뭔가가 있었다.
은색. 캔커피.
* * *
선호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캔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직 차갑다는 뜻이다. 누군가 방금 올려놓았다는 뜻이다.
뭐지?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자기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다들 고개를 숙이고 공부 중이었다. 대각선 자리의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선호는 다시 캔커피를 봤다.
편의점에서 흔히 파는 것이었다. 아메리카노. 무가당.
누가 둔 걸까. 잘못 둔 건가?
선호는 옆자리를 봤다. 빈자리였다. 그 옆도 빈자리. 자기 주변엔 사람이 없었다.
나한테 둔 건가?
그럴 리가.
선호는 당황스러웠다. 도서관에서 모르는 사람한테 음료를 주는 게 말이 되나? 누가 그런 짓을 하지? 이상한 사람인가? 아니면 약을 탄 건가?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버릴 수 없었다.
선호는 캔커피를 집어 들었다. 차가웠다. 물방울이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냄새를 맡아봤다. 그냥 커피 냄새.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 가방에 넣었다.
일단 가져가자. 나중에 생각하자.
* * *
심장이 두근거렸다.
해주는 고개를 숙인 채 글씨를 쓰는 척했다. 손이 떨려서 글씨가 삐뚤어졌다.
받았다.
캔커피를 가방에 넣는 걸 봤다. 버리지 않았다.
해주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생각했으려나. 아마 그랬을 것이다. 갑자기 책상 위에 음료가 있으면 누구든 이상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저 사람이 조금이라도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나도 힘들 때 누군가 작은 친절을 베풀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으니까.
해주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쪽을 봤다.
그가 책을 펴고 있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깨가 조금 펴진 것 같았다.
……다행이다.
*4화 이어서 보기
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