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커피 한 잔의 온도[8화]

8화. 무너지는 시간

by 선비천사

8화. 무너지는 시간


2주가 지났다.
그녀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선호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책을 펴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활자가 눈앞에서 미묘하게 흔들렸다.
한 줄을 읽어도 머릿속에 남는 게 없었다.

형광펜을 들어도 어디에 줄을 그어야 할지 모르겠다.
중요한 문장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외워야 하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340페이지.

책갈피는 여전히 거기에 꽂혀 있었다.
2주 동안 단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했다.

멍청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에서는 계속 같은 말이 울렸다.
자책이 밀려왔다.

여자 하나 안 보인다고 이러고 있어?
말도 제대로 나눠본 적 없는 사람인데.

이래서 뭘 하겠다는 거야.
이래서 첫 직장도 못 버틴 거야.
이래서 서른이 되도록 아직도 이 모양인 거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밤마다 잠들기가 힘들었다.
눈을 감으면 더 많은 생각이 몰려왔다.

천장의 물 얼룩이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상하게 웃는 얼굴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그냥 누렇고 칙칙한 얼룩일 뿐이었다.
곰팡이 자국이 번진 벽과, 축축한 공기와, 숨 막히는 방.

그것들이 전부 현실처럼 느껴졌다.


* * *


토요일 밤.

선호는 반지하방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불을 끈 방 안은 어두웠지만, 창문 틈으로 들어온 가로등 빛이 천장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얼룩이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다.

선호는 가만히 누운 채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걸까.

캔커피 하나에 힘을 얻었다가.
그 캔커피 하나가 없어졌다고 이렇게 무너지고.

고작 그거 하나로.

한심했다.

입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웃음 같지 않았다.

그녀가 뭐라고.

말 한마디 나눈 적도 없는 사람인데.
이름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그런데.

그녀가 있으면 버틸 수 있었는데.

그녀가 저기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일도 볼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도.

하루를 버틸 수 있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갈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는데.

그게 전부였는데.

선호는 눈을 감았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울지 마.
이런 걸로 울지 마.

고작 이 정도 일로.

하지만 눈물이 흘렀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하게.

소리도 없이.

베개를 적시며.

어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9화 이어서 보기

캔커피 한 잔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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