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커피 한잔의 온도[10화]

10화. 다시 은빛, 그리고 쪽지

by 선비천사

10화. 다시 은빛, 그리고 쪽지


한 달 하고 사흘째 되는 날.

선호는 평소처럼 도서관에 갔다. 평소처럼 같은 자리에 앉았다. 평소처럼 책을 폈다.

345페이지. 한 달 동안 겨우 5페이지를 넘겼다. 한심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포기하면 끝이니까. 느려도 계속 가면 언젠가는 도착하니까.

오후 두 시.

선호는 화장실에 갔다. 습관이었다. 점심 먹고 좀 지나면 화장실에 가는 게. 볼일을 보고 손을 씻고 돌아왔다.

자리에 앉으려다, 멈췄다.

숨이 멎었다.

책상 위. 은빛. 캔커피.

그리고. 얇은 종이. 쪽지.

선호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뭐야. 뭐야 이거. 손이 떨렸다.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공부 중이었다. 아무도 자기를 보고 있지 않았다. 대각선 자리는 비어 있었다.

선호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캔커피를 만졌다. 차가웠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진짜야. 꿈이 아니야.

쪽지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떨려서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접힌 쪽지를 펼쳤다. 깔끔한 손글씨. 짧은 문장.


[1층 커피점에서 만날게요.]


선호는 쪽지를 들고 굳어버렸다. 글자를 세 번, 네 번 읽었다.

만날게요. 만나자고? 나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두근두근. 귀까지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어떡해. 지금 가야 해? 이 모습으로?

선호는 자기 모습을 내려다봤다. 오늘따라 후줄근한 검은 후드를 입었다. 머리도 안 감았다. 어제 늦게 잤더니 눈도 충혈됐다.

최악이야. 하지만 안 갈 수 없었다.

선호는 가방을 챙기지도 않고 일어섰다. 열람실 문을 열고 나갔다. 계단을 내려갔다.


* * *


1층. 커피점.

유리문 너머로 보였다. 구석 자리. 긴 생머리. 밝은 니트. 그녀가 앉아 있었다.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선호는 문 앞에서 멈췄다. 다리가 떨렸다. 진짜 있어. 한 달 만에 거기 앉아 있어.

심호흡을 했다. 손으로 머리를 정리했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문을 밀었다.

딸랑. 벨 소리가 났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손을 들어 흔들었다. 작게. 그리고 웃었다.

선호의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웃고 있어. 나한테 웃고 있어.

그는 떨리는 다리로 한 걸음, 두 걸음 걸었다. 그녀 앞에 섰다. 입을 열었다.

“저…”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가 먼저 말했다.

“앉으세요.”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맑았다. 조용하고 따뜻했다. 선호는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아메리카노 두 잔이 있었다. 하나는 그녀 앞에, 하나는 그의 앞에.

미리 시켜놨구나. 그 배려에 또 심장이 뛰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저, 윤해주예요.”

해주. 그녀의 이름. 선호는 그 이름을 마음속에 새겼다. 해주. 윤해주.

“저는… 강선호입니다.”

겨우 대답했다. 해주가 미소 지었다.

“알아요.”

“네?”

“도서관에서 봤으니까요.”

선호는 얼굴이 빨개졌다. 봤다고? 언제부터? 해주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캔커피, 잘 드셨어요?”



*11화 이어서 보기

캔커피 한 잔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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