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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7. 2021

32주. 인 디 아일(2018)

2020. 02. 09. by 만정

어슴푸레한 새벽의 주차장. 멀리 고속도로 위로 드문드문 차들이 지난다. 이게 뭔가 싶은 순간,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흘러나온다. 4분의 3박자 왈츠 리듬을 타고 창고형 매장 곳곳이 스틸 사진처럼 소개된다. 냉동식품 코너, 음료 코너, 통제실... 매장에는 아직 손님도 직원도 없다. 오직 마트만이 주인공인 것처럼. 본격적으로 왈츠를 춰야 할 것 같은 순간, 유유히 지게차 한 대가 등장한다. 지게차는 지금까지와 다른 속도감으로 매장 통로를 경쾌하게 가로지른다. 물론 리듬에 맞춰. 곧 카메라가 합세해 지게차의 파트너인 듯 함께 춤춘다. 물론 리듬에 맞춰.


‘인 디 아일’의 첫 장면은 문단 하나를 할애할 가치가 있다. 창고형 매장이 놀이동산처럼 흥미진진하고, 왈츠처럼 경쾌한 장소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대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빨리 가요, 너무 가고 싶어서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하고 말하는 영화의 화자는 손님이 아니다. 여긴 일터고, 주인공은 노동자란 말이다. 그런데도 영화가 소개하는 마트는 너무 매력적이어서, 하마터면 나마저 마트에서 일하고 싶어질 뻔했다. 물건 상자만 선반 가득 쌓인, 해 한 줌 안 드는 그 통로에서 말이다. 그것도, 해가 잘 드는 사무실에서 조차 회사 다니는 고통에 허우적대다가 그 싫음 때문에 자신의 일부를 거의 불구로 만들어버린 나라는 사람이. 통상-아니면 적어도 내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작업장, 그리고 내 인생 최대의 고난이자 딜레마인 노동. 영화는 인트로만으로 이미 이 두 주제를 나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것임을 예고한다. 게다가 시각과 청각, 리듬에 있어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영화적 문법으로! 매장 통로에서. 쯤으로 번역할 수 있을 이 영화의 인트로가 예고하는 일터와 노동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일하러 간다. 아름답고 우아한 그곳으로. (심지어!) 기대감을 안고.


영화는 세 챕터로 구성된다. 신입사원 크리스티안, 그가 사랑하는 캔디류의 마리온과 크리스티안의 사수 브루노. 각 챕터는 일관되게 다음의 어조로 말한다. 이 일터가 최선이 아니라해도, 나는 나의 일터로 간다. 일터로 향하는 기대감은 가볍게 솟아오른다. 그곳에는 해야 할 일과 그 일을 함께 할 동료가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코페르쿠스니적 전회였는데, 영화에 따르면 출근은 나만의 개인적인 고통과 문제가 있는 집을 벗어날 기회이다. 영화는 흔히들-아니면 적어도 내가- 이상화하듯이 '집'이 완벽한 곳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집은 개인적인 문제와 고통, 외로움으로 점철된 공간이기도 함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반면 일터에는 그곳만의 논리와 즐거움이 있다. 우아하게 일을 해내는 즐거움과 만족감 말이다. 일로 만난 사이 역시, 흔히들 폄훼하 듯, 피상적이지만은 않다. 동료 간에도 우정과 친밀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물론 그 친밀감이 해결해줄 수 없는 개인적인 생활과 문제가 있다. 그 영역은 공간적으로 '집'이며, 동료들이 범접할 수 없는 곳이리라. 때로 그 집에 들어설 정도로 가까워진다고 해도, 그 (집)의 문제를 다만 볼 수 있을 뿐, 해결해줄 수 없다. 조금도. 그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씁쓸함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출근한다. 직장에서 할 일과 동료라는 관계는-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삶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므로. 또는 삶을 견디게 해주므로. 나는 이렇게 이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한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챕터는 크리스티안이다. 신입사원으로 음료류에 출근한 그는 사수 브루노로부터 매장 상황(어떤 부서와 어떤 부서가 가깝고 먼지)을 듣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배우고(담배는 어떻게, 언제, 어디서 피워야 할지), 주변 다른 코너 사람들과 알아가는 ‘정상적인’ 회사생활을 차근차근 겪어나간다. 신입사원에게 언감생심 허락되지 않은 지게차를 바라보는 동경의 눈빛, 막상 지게차를 배우게 되자 너무 어려워 쩔쩔매는 모습, 좀처럼 쉽게 나아지지 않는 과정, 그러나 마침내 어느 순간 자유자재로 지게차를 몰게 되는 과정이 가히 감동적이다. 사실,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지게차 모는 일을 동경할 건 뭐고, 못해서 쩔쩔맬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매장이라는 세팅 안에서는 그것이 너무나도 의미 있는 일이어서, 지게차 자격증 시험을 보는 순간에는 크리스티안 본인뿐 아니라 지켜보는 다른 코너의 동료들조차 숨을 죽이고 침을 삼키며 바라보고, 마침내 성공했을 때에는 자기 일처럼 축하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1월은 내게 두려움의 시간이었다. 8년 10개월을 다니다 두 달 쉬었을 뿐인데 복직하려니 마치 다시 신입사원이 된 것 같았다. 새로 맡은 일은 입구와 출구가 안 보이고-즉,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겠고-, 주변에서는 왜 일을 안 하냐고 답답해하고, 한 일이 대해서는 잘못했다고 혼이 잔뜩 났다. 나는 내가 모르고, 실수하고, 틀리고, 못하는 상황이 불편하고 두려웠다. 처음이었다.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상황, 즉 일을 배우는 과정을 나는 지금껏 그렇게 유예해왔던 것이다. 혼돈의 1월이 지나고 2월이 오자, 다른 우회로가 없다는 게 분명해졌다. 나는 욕을 먹고 혼나고 쩔쩔매고 못하겠다고 말하면서 이 과정을 거쳐야만 함을 받아들였다. 운이 좋다면 덜 힘들게, 더 잘 이 시기를 지나겠지만, 겪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내 상황을 '동료들'에게 드러내고 얘기했다. 이것도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평가받는다는 사실이 짜증 나서 회사 사람에게 라면 아무것도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다. 10년 차. 늦다면 늦고 빠르다면 빠른 이제야 나는 처음으로 회사에 계속 다닐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숙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지만, 처음으로 외부인이 아닌 회사의 일원인 것처럼 행세했다고나 할까. 그러자 주변 아저씨들도 나를 동료로 받아들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모든 것은 열려있지만, 어쩌면 이렇게 회사원이 되어 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끝에서 적어도 하나는 알게 되겠지. 내가 계속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

 

영화는 내가 표현한 것 이상으로 시적이고 아름답다. 런타임 대부분이 창고 같은 매장에서 촬영되었고, 소재는 노동이라 -적어도 내게는- 아름다울 구석이 전혀 없을 것 같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웅장하고 경이로운 샷들이 이어진다. 왈츠를 비롯해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등 클래식 음악이 이 장소에 아름다움과 우아함, 생기를 더하고, 때로는 이 건조하고 어두운 곳을 사색적인 공간으로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 역시 나의 일터에서 나만의 OST를 머릿속에서 재생하는 것으로 마법을 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확실한 것은 복직 이후 지금까지는 Pink Floyd의 'Wish You Were Here'가 한 번도 들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난 9년 동안 출근의 무의미함을 당신에게 마음속으로 말하던 그 가사. 글쎄 내가 그랬어, 하며 지나온 날에 대해 얘기하듯 딱 한 번만 당신에게 말해볼 셈이다.

 

We're just two lost souls

Swimming in a fish bowl.

Year after year

Running over the same old ground,

What have we found?

The same old fears.

Wish you were here.


내일 아침에도 우린 출근할 것이다. 물론 이런 가사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다시 출근할 당신과 나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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