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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정 Mar 26. 2021

31주.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

2020. 02. 02. by 감자

내 기억이 맞다면, 내가 영화관에서 두 번을 본 영화는 딱 두 작품이다. 하나는 ‘왕의 남자’이고, 또 하나는 바로 오늘의 영화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이하 매드맥스4)’이다. 영화관에서 처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바로 다음번 관람 일정을 잡았었다. 두 번째 관람을 하고 나서도 처음 같은 아드레날린에 가득 찼다. 이 영화는 영화만이 줄 수 있는 쾌감을 상영시간 내내 선사했다. 그것도 거의 최대치로.


매드맥스4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철과 불과 모래다. 뜨겁고 까끌까끌하며 번쩍번쩍 빛나는 것. 매드맥스4를 중독성 넘치는 블록버스터로 만드는 요인은 이 호쾌하고 단순한 이미지들이다. 이 이미지들은 스팀펑크적인 B급 미감을 자극한다. 영화에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거대한 녹슨 기계들과 피폐한 사람들을 연료처럼 싣고 달리는 눈부신 탈것들, 압도될 만큼 거대한 덩어리와 그 안을 촘촘히 채우고 있는 자그마한 부품들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일러스트적 볼거리들이 가득하다. 각 장면은 그 씬 자체로 꽉 차 있고 음악이나 복선 같은 다른 선적인 요소들과 굳이 연결될 필요가 없다. 양키 블록버스터임에도 어쩐지 일본 아니메적 ‘오타쿠함’이 느껴지는 이유이다. 물론 이런 양키 니폰 오타쿠 영화의 최고봉은 '퍼시픽 림'이지만.


이 영화는 정말, 정말 정말 호쾌하다. 영화는 사정없이 달리고, 터트리고, 뒤집고, 소리친다. 영화의 90%는 호쾌한 ‘간지’로 채워져 있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뭉개진 얼굴을 가리고 붉은 쫄쫄이 상하의를 입은 기타리스트가 추격전의 대열 최전방에서 기타 넥에서 불을 뿜으며 혼이 실린 연주를 하는 씬을 고르겠다. 귀를 찢는 기타 속주가 돛을 밀어주는 바람이라도 되는 양 광기 어린 돌격대들은 소리를 지르며 차를 몬다. 그때 불어닥치는 모래바람과 번쩍이는 차체들은 4D 영화관이 아님에도 뜨거운 금속 냄새를 맡게 만든다.


영화의 주인공은 퓨리오사와 맥스지만 그들만큼 영화 속 자동차들이 중요한 캐릭터성을 가진다. 퓨리오사가 독재자 임모탄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스플렌디드를 포함한 여성들을 데리고 요새를 빠져나올 때, 물(영화 내에서 물은 ‘아쿠아 콜라’라는 이름을 갖는다. 오타쿠적 유년기를 가진 나는 그 명명 방식에서부터 자지러질 수밖에 없었다)을 싣고 달릴 수 있는 거대한 탱크로리는 그들의 움직이는 요새가 된다. 사막에서 식수는 생명만큼 소중하고, 식수를 가득 가진 퓨리오사는 그 빛나는 은색의 탱크로리만큼 위대한 존재로 드러난다. 물과 여성들을 탈취당한 임모탈은 극대노하여 퓨리오사 일행을 뒤쫓는데 그때 꾸려낸 정예부대는 극도로 강하고 호화로운 자동차들로 이루어져 있다. 앞서 언급한 미친 기타리스트 씬 역시 자동차를 개조해 만든 움직이는 무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낡아빠진 자동차를 타고 모래 폭풍 속을 달려나가는 정신 나간 어린 광신도 워보이들은 임모탄과 ‘8기통’을 찬미하며 암으로 죽어가는 목숨을 부나방처럼 불태운다. 주인공인 맥스 역시 이 모든 여정을 워보이들에게 빼앗긴 자신의 차를 되찾아 오기 위해 시작한다. 자동차가 없으면 절대로 성립할 수 없는 영화인 것이다.


절체절명의 쫓고쫓김을 긴박하게 만드는 요인들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이 가진 기괴한 신체다. 핵전쟁 이후 멸망해 버린 디스토피아라는 영화의 세계관에 충실하여 등장인물들의 상당수는 방사능에 피폭되어 고통받는다. 워보이 눅스는 자기 몸에 자라는 세 개의 암덩어리들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임모탄은 육중한 몸에 비해 창백한 피부에 샛노란 눈동자라는 병약한 기질이 엿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고 그 대비가 권력과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집착을 더욱 역겹게 만든다. 임모탄의 자식들은 대개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 아들들 중 뇌가 발달하지 않은 막내와 목 아래가 유아인 채로 자라지 않는 첫째는 아버지의 호위부대에 동행하여 임모탄의 비정상성과 광기를 드러낸다. 퓨리오사는 강하지만 팔 한쪽이 절단되어 있다. 이러한 기괴한 신체들은 쇳덩어리들로 인해 장식되고 가려진다. 임모탄은 얼굴과 몸을 갑옷과 같은 도구로 가리면서 연약함을 감추어 강인한 육체로 보이게 만들고 퓨리오사는 투박한 철제 의수를 원래 자기 몸처럼 사용한다. 이 세계에서 건강한 몸을 가진 자들은 오히려 그 희소한 가치 때문에 착취의 대상이 된다. 젊고 아름답다는 이유로 임모탄의 손아귀에서 성적 착취를 당하는 다섯 아내들이나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rh+ O형 혈액을 가진 맥스가 ‘피주머니’ 취급을 당하며 눅스의 차에 수혈팩으로 매달리는 신세가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퓨리오사는 물과 여성들을 데리고 임모탈의 폭정에 신음하는 시타 델을 떠나 어머니의 땅으로 가고자 한다. 사막이 아닌 물과 녹음이 있는 푸른 땅을 꿈꾸며 거친 여정을 이겨나가지만 그 과정에서 보이는 어둡고 끝도 없는 광막한 공간은 절망적이기만 하다. 시타 델에서 빠져나온 지 한참이 되었음에도 피폐한 땅은 끝이 보이질 않는다. 습지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리가 길어진 기괴한 모습을 한 생명체가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통해 관객들은 이미지들로 이들의 상황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폭력적인 설정 투성이면서도 이미지 중심적인 영화 이건만 이 영화는 일본 아니메가 가지는 질척함이 없다. 그건 퓨리오사와 맥스의 합리성 때문이다. 둘은 자기 연민과 자아도취 양쪽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대의를 가지고 행동하지만 대의를 곱씹으며 공동체 의식을 다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은 서먹하고 어색한 사이이며 원하는 바도 다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맥스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 인물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임모탄의 폭정으로부터 탈출하고 살아 있는 땅을 찾아내어 핍박받는 자들을 구하겠다는 대의가 있는 퓨리오사에 비해 맥스는 그냥 자기 차를 찾아내서 그걸 타고 사라질 뿐이다. 아무 목적도 없으면서 퓨리오사 일행에게 붙들린 채로 그들의 여정을 함께 하는 맥스는 그렇기 때문에 항상 뒤로 빠져 있고 그 점이 이 영화가 여성 중심 서사를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이러니 저러니 얘기를 막 했지만 사실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은 이거 하나면 끝이다. “진짜 재미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처음으로 차를 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고, 관람 후 2년 뒤 나는 진짜로 운전면허를 따게 되었다. 이 정도라면 한 사람의 가치관을 바꾼 영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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