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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런 Aug 12. 2019

항생제 치료 시작

맹장터진이야기, 일곱 번째

맹장터진이야기, 여섯 번째 에서 계속..




Day 10: 화요일 (입원 1일 차)

출근하다 말고 입원을 한 나는 먼저 아내에게 연락했다. 맹장이 이미 터졌다고 합니다. 네, 그렇다고 합니다. 고마워, 자기가 말한 병원에 안 갔으면 그냥 계속 죽과 장염약으로 연명했을 텐데. 미안해, 처음부터 자기가 말한 병원에 갔었다면 벌써 수술받았을 텐데. 5년째 오늘의 교훈. 아내의 말을 잘 듣자.


그다음엔 회사 HR과 팀원들. 맹장이 이미 터졌다고 합니다. 네, 장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수술은 확정, 일정은 미정. 입원은 놀랍게도 이미 했답니다. 며칠간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요. 죄송하지만, 급히 병가를 내겠습니다.


아침엔 그저 어안이 벙벙했는데 생각해보니 억울하다. 위치는 맹장이지만 장염 같다고 말했던 의사 선생님들, 특히 빵이랑 단 거 많이 먹어서 가스가 찼다고 말한 의사 아저씨가 너무 미웠다. 그래도 뭐, 별수 없지. 맹장은 이미 터졌는데. 늦게라도 알게 되었으니 빨리, 잘 치료받아야지.


이른 오후, 의사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잠시 외출을 했다. 회사에서 맥북과 책 몇 권을, 집에서 옷가지와 텀블러를 챙겼다. 입원하면 샤워하기 어렵지 않을까. 휘리릭 찬물에 몸을 씻은 후, 다시 병원으로.


개량한복처럼 생긴 환자복을 입고 잠깐 병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의사 선생님이 날 찾았다. 허허, 그냥 보면 하나도 안 아픈 사람 같은데. 너무 말짱해 보이는 날 보고 헛웃음을 짓는 의사 선생님. 잠깐 이리 앉아보세요. 지금 어떤 상태인지 다시 한번 설명해드릴게요.


맹장이 터졌는데 바로 수술을 안 해도 되나? 이게 제일 궁금하실 거예요. 아마 맹장 터지면 다들 급하게 수술하니까. 의사 선생님은 옆에 있는 A4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 이게 장입니다. 대장 소장 여기는 여기가 항문. 맹장은 이쪽에 있는데 그 옆에 작게 튀어나온 게 있어요. 이걸 충수돌기라고 부르는데, 지금 여기 염증이 생겨서 터진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근본적으로 수술을 해야 됩니다. 절제, 떼어내는 거죠.


지금 다행인 건 고름이 많이 없어요. 그건 왜 그러냐. 우리 장 위에는 커튼처럼 생긴 장판막이라는 게 있는데, 어느 부위에 문제가 생기면 그곳을 덮어서 퍼지는 걸 막아줘요. 환자분 같은 경우에 이 장판막이라는 녀석이 제 역할을 잘 한 거죠. 그래서 염증은 있고 통증도 있지만, 고름이 많이 없는 거예요.


다음으로 지금 바로 수술을 하지 않는 이유. 염증 때문에 주변 부위가 부어있는데, 많이 과장해서 보자면 이렇게 얇아야 하는 관이 이렇게 두꺼워진 거예요. 그런데 지금 여기를 묶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세게 묶으면 잘릴 수 있고, 잘릴까 봐 느슨하게 묶으면 나중에 부기가 빠지면서 내용물이 새어 나오겠죠. 내용물은 대변입니다. 똥.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당장 해야겠다. 그러면 부어오르지 않은 부위까지 올라가서 묶어야 되는데, 그럼 수술 부위가 넓어져요. 대장이랑 소장도 조금씩 같이 잘라야 하는 거죠. 하지만 멀쩡한 장기를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후유증도 심할 거고. 그러니까 먼저 항생제를 써서 부종을 가라앉히고 나중에 수술하는 거죠.


수술은 예전보다 많이 간단해졌습니다. 배꼽 아래 구멍을 뚫어서 진행할 거고 상처도 거의 안 남아요. 필요할 경우에는 아래쪽에 구멍을 하나 더 뚫을 수는 있어요. 조금 더 작은 구멍.


그럼 수술은 언제 하느냐. 학술적으로는 6주에서 8주 정도 이후로 말하는데 그렇게까지 길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고요. 오늘부터 병원에서 2~3일 동안 항생제 치료를 받고 그다음에는 먹는 약으로 바꿔서 한 일주일 정도 있다가 병원 오시면 수술 날짜 잡고 진행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한 2~3주 정도 후에 수술하는 거로.


퇴원 후에 받은 진단서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있었다.

병명:
(주 상병) 파열 또는 천공에 다른 범(미만성)복막염을 동반한 (급성)충수염
급성 복증

치료 내용 및 향후 치료에 대한 소견:
복통을 주소로 본원에 내원한 자로 상기병명으로 진단됨.
충수돌기 주변 부종으로 항생제 치료를 먼저 시행하였고, 충수돌기 절제술 예정인 자임.




Day 11: 수요일 (입원 2일 차)

식음을 전폐했지만 손등으로 항생제 3종과 수액을 24시간 먹었더니 배가 고프진 않았다. 속이 좀 메슥거리고 입에서 약 냄새가 풍겼지만 그 외에 힘든 점은 별로 없었다.


4인실의 첫날밤이 지나자 룸메이트 아저씨들이 모두 퇴원하여 잠깐 독방 신세. 저녁 즈음 어떤 할아버지가 입실하셨는데 거동이 많이 불편하신지 전화를 잘 받지 못하셨고, 불쑥불쑥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저녁 여덟 시가 조금 넘은 시각, 무섭게 생기지 않았지만 왠지 무서운 분위기의 중년 부부가 방문했다. 갑자기 커튼 너머로 들리는 중국어. 중국분이신가. 새벽에는 네시부터 전화벨 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우더니, 한 시간쯤 뒤에 그의 자녀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명과 손주인듯한 건장한 청년 한 명이 나타났다.


새벽 여섯 시 즈음부터 아주머니와 청년은 빈 침대에 올라가 커튼을 치고 잠을 청했다. 갑자기 낯선 가족에게 포위된 나. 머리가 아플 수 있다며 간호사님이 낮춰주었던 할아버지의 베개를 아주머니가 한껏 높게 받쳐준 탓에 할아버지는 트럼펫 코골이를 시작. 잠을 포기한 나는 넷플렉싕을 하려 에어팟을 꺼내다가 잠결에 손을 헛디뎌서 콩나물들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침대 밑을 살피려 쪼그려 앉는데 찌-익 바지의 절규. 허허, 참으로 흥미로운 새벽이군. 간호사님, 죄송하지만 바지가 찢어졌습니다.


결국 낯선 가족은 열 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나 병실을 떠났다. 나가기 전에 커튼 틈 사이로 내게 목인사를 건네는 아주머니. 안녕히 가세요. 덕분에 몹시 일찍 일어났습니다.




Day 12: 목요일 (입원 3일 차)

낯선 가족이 떠난 후 병실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4인실 독방의 평온한 하루. 아침 일찍 왼손에 꽂혔던 바늘을 빼고, 오른팔에 바늘을 꽂았다. 항생제 연결하기 전에 피검사부터 할게요. 따-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침대 위에서 자세를 고쳐앉다가 다시 바지가 찢어졌다. 엉덩이에 가시가 돋았나.


오후에 찾아온 의사 선생님은 기대보다는 조금 덜 미치지만 염증 수치가 많이 낮아졌고 계획대로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서 배를 만져본 그는 많이 부드러워졌다며 내일부터는 죽을 먹어보자, 희소식을 전해주었다.조금 천천히 드세요. 반찬이 같이 나올 텐데 조금 먹어보고 너무 짜거나 자극적이다 싶으면 되도록 먹지 마시고요. 그럼 내일 퇴원하나요? 아뇨, 식사하시면서 하루 더 경과를 보시죠.


병가 +1일.




Day 13: 금요일 (입원 4일 차)

아침부터 두 명의 환자가 들어와 4인실 독방생활은 하루 만에 막을 내렸다. 며칠 만에 입으로 밥 먹는 날. 아침에는 전날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반찬은 본체만체하고 흰죽만 먹었다. 점심에 나온 고기반찬은 냉큼 입에 넣었지만 생각보다 질기길래 즙만 씹고 뱉어버렸다. 다행히 저녁때는 부드러운 고기가 나와서 꼭꼭 잘 씹어 삼켰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의사 선생님과 만남. 어제보다도 배가 더 많이 부드러워진 것 같네요. 내일 퇴원하시고 약 지어드릴 테니까 다음 주에 만나서 수술 날짜를 잡으시죠. 선생님, 그럼 죽 먹어야 하나요? 그냥 밥 드셔도 됩니다. 너무 맵거나 짠 거만 피하세요.




Day 14: 토요일 (입원 5일 차)

감격의 퇴원. 마치 군대에서 첫 휴가 나온 느낌. 아름다운 세상. 죽 먹어야 하는 거 아냐? 아냐, 밥 먹어도 된다고 하셨어. 밥 먹자 밥.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집밥.






맹장터진이야기, 여덟 번째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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