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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May 05. 2020

어둠과 아름다운 빛의 기억

잠 못 이루던 밤의 시간여행 : 기억의 조각들

잠 못 들던 밤을 위하여


도시에 사는 우리는 늘 광기의 빛과 만난다.

길을 밝혀 주는 가로등이라면 모를까 모두가 깊이 잠든 밤에도 꺼지지 않고 현란하게 빛나는 불 꺼진 상가의 간판들. 요즘 같은 시대에 저들을 시간 맞춰 끄고 켜는 일은 조금만 고려되어도 가능한 일이련만.


전등을 끄면 곧 어둠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부터 남편은 밤마다 안방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빛 때문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며 불편해했다. 밤이 새도록 켜져 있는 상가 간판들의 빛 때문에  불을 끄고 누워도 방 안은 늘 환했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쉽게 잠들곤 하던 나에게는 그 불편이 다가오지 않았다. 나에게도 잠 못 드는 날이 생기기 전까지는. 나이 들어가면 걱정거리는 그 숫자가 적어지지만 그 부담의 크기는 훨씬 커진다고 누가 이야기했던가! 여러 가지 걱정에 잠 못 드는 밤이 많아지면서 내게도 그 불편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얇은 커튼으로 그 불빛을 가리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 강한 빛 때문에 우리 둘 다 쉽게 잠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거실 쪽에서 바라다 보이는 바깥 풍경이라야 닥지닥지 간판을 매단 상가들과 아파트들 뿐이다. 그 풍경이 답답해서 나는 늘 꽃밭이 있는 안방 쪽을 항상 열어두고 거실 쪽 블라인드는 내린 채  한쪽 귀퉁이 만을 조금 열고 살았다.

밤에 거실 쪽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면 낮에 보았던 건물들의 갑갑한 외향은 사라진다. 도시는 멀리 별빛처럼 켜진 수많은 불빛들로  눈 내린 아침, 모든 어설픈 것들이 감춰지던 새벽 풍경처럼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

잠 못 들어 서성이는 나에게 그 밤의 빛은 두 개의 얼굴을 지녔다. 불편과 아름다움의 두 얼굴.


밤이면 안방에 암막커튼을 치고 안방 측 블라인드까지 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베란다에 있는 작은 꽃밭 모서리를 밟고 매일 저녁 블라인드를 닫고, 아침이면 블라인드를 열기 시작했다. 조금은 귀찮은 일이었지만 숙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조금씩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화단의 꽃들도 더 많고 실한 꽃들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연일 잠 못 드는 밤을 겪으며 이제야 어둠의 소중함을 느낀다.







- 어둠과 아름답던 빛의 기억들




외할머니 집 방문은 창호지를 바른 문살이 예쁜 여닫이 문이었다. 문고리를 밀고 문을 열면 댓돌로 내려설 수 있던 작은 시골집.

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면 댓돌 아래에 넘실대던 부드러운 달빛, 산과 마을을 비추던 온화하고 부드럽던 달빛.

한밤중에 화장실을 가려고 밤늦게 마당에 내려서면 달빛 아래 먼 산이 그 윤곽을 더 뚜렷하게 드러내고 별빛은 더 부드럽게 빛나던 밤.


어느 잠 못 들어 뒤척이던 날 밤에  밤늦게 마종기 시인의 박꽃 이란 시를 읽다가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 시절을 함께 한 외할머니, 내가 간직한 소중한 빛과 어둠의 기억들이.


박꽃

그날 밤은 보름달이었다.
건넛집 지붕에는 흰 박꽃이
수없이 펼쳐져 있었다.
한밤의 달빛이 푸른 아우라로
박꽃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박꽃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네.
아버지 방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한마디.
얼마나 또 오래 딴생각을 하며
박꽃을 보고 꽃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었을까.
- 이제 자려무나.
- 네, 아버지.
문득 돌아본 아버지는 눈물을 닦고 계셨다.

오래 잊었던 그 밤이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내 아이들은 박꽃이 무엇인지도 한번 보지 못하고
하나씩 나이 차서 집을 떠났고
그분의 눈물은 이제야 가슴에 절절이 다가와
멀어져 있는 것이 하나 외롭지 않고
내게는 귀하게만 여겨지네


밤중에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는 내게 할머니가 무어라고 하셨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다.  단지 그 달빛과 별빛만이 아련하게 가슴속에 남아있을 뿐.  


어둠 속에서 포근한 할머니 곁에 누워 옛날이야기를 지치도록 듣다가 잠이 들쯤이면 눈앞에 수많은 색색의 작은 입자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흘러 다녔다. 빨강, 노랑, 초록, 금빛.. 어둠 속에서만 가능했던 입자들의 흐름은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한 방향으로 흐르며 나를 현혹시키곤 했다. 그 행렬을 어둠 속에서 바라보다 지칠 즈음이면 교과서에서 읽은 동화가 생각나고 벽장 속 어디에서인가 어여쁜 인형 아가씨들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을 자려는데 책상 서랍 안에서 나는 달가닥 달가닥 소리에 아이는 잠이 깨어 무서워진다. 갑자기 캄캄한 방 안에 환한 빛이 비치고 그 속에서  인형 아가씨가 나타났다. 처음엔 노란 옷 입은 아가씨가, 그리고 하얀 옷,  빨강 옷, 보라 옷, 연분홍 옷들을 입은 아가씨들이 차례로 나와 빙빙 돌며 춤을 춘다. 갑자기 어디선가 날개 달린 흰 옷 입은 천사들이 아가씨들의 머리 위를 빙빙 날고 있다. 천사들이 들고 있는 단지에 아가씨들이 무엇인가를 자꾸 담아 준다. 단지가 가득 차자 천사들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빛도 아가씨들도 사라져 버리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이는 잠이 든다. 다음날 자고 일어난 아이가 어젯밤 일이 생각나서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봉숭아, 해바라기, 분꽃, 채송화, 같은 꽃씨가  든 흰 봉투가 들어있다. 얼른 땅속에 묻혀 고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보고 싶어서 서랍 속 잊고 있었던 꽃씨들이  인형 아가씨들이 되어 어젯밤 서랍 속에서 나와 춤을 춘 것 같다고 아이는 생각한다. 예쁜 꽃들이 피어나는 꽃밭을 생각하며 아이가 누나와 꽃씨를 심는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니 '나무야 누워서 자거라'같은 예쁜 동화를 쓰신 강소천 님의 '꽃씨'라는 동화였다.


사랑스럽고 아련한 그 옛날 동화 속 이야기는 지금도 나를 가슴 설레게 한다. 교과서에 그려진 어둠 속 환한 빛 속에서 춤추던 예쁜 인형 아가씨들의 그림이 꿈속처럼 어렴풋이 그려진다.


밤하늘을 바라다보면 그리운 이들이 생각난다.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도 잊고 일에 쫓기어 살다가 삭막한 삶에 지쳐 갈 때면, 그제야 잊고 있었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었다. 그럴 때면 어느샌가 따뜻했던 사람들과 그 시간들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나 지친 나의 고단한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그 짙은 어둠과 부드러운 빛의 기억들이..  새날을 사는 힘을 내게 전해 주는 것 같았다.




이제는 시골로 내려와 세상을 떠난 시어른들이 사시던 작은 시골의 아파트 1층 집에서 잠드는 밤이 많아졌다. 나의 집이 아니므로 느끼는 어색함 속에서 뒤척이다가 어린 시절 보았던 작은 입자들의 흐름을 찾아보기도 하고 지난 시간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다 창으로 비취는 주목 그림자와 함께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든다. 비록 아파트라 하여도 불을 끄면 바로 짙은 어둠이 다가온다. 익숙한 어둠 때문인지, 고된 농사일 때문인지,  분을 떠나보낸 그 집에서 불면을 호소하던 남편은 너무도 쉽게 잠들곤 한다. 나도 그 속에서 옛 추억을 그리다가 깊은 잠에 빠져든다.

온전한 어둠 속에서 불면의 밤은 사라졌다


빛만큼이나 어둠의 소중함을 알아간다.

인공의 빛을 잠시라도 잠재우고 싶다. 우리의 어둠을 지킬 수 있도록. 

끝없는 욕망의 상징인 저 환한 간판들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깨어있는 수많은 이들도, 가로수들도, 공원의 나무들도 힘든 하루를 내려놓고 아주 잠시라도 푹 잠들 수 있을 수 있다면....

모두가 온전한 어둠 속에서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다면...



도시에 돌아오면 나는 밤마다 블라인드를 내리고 암막커튼을 치고 소중한 나의 어둠을 다시 부른다. 아직은 덥지 않아 가능한 일이지만 여름이 다가와 암막커튼이 불편해지면  못 드는  밤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누가 저 불빛 좀 꺼 주세요!


Main Photo : by Cata on Unsplash

Photo 1 :  by Kym MacKinn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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